(권소현의 일상탈출)(28)거머리 습격 사건

  • 등록 2007-02-23 오후 4:31:03

    수정 2007-02-23 오후 4:31:03

[이데일리 권소현기자] 드디어 트레킹을 떠나는 날! 밤새 뒤척이느라 잠을 거의 못 잤다. 안나푸르나를 안내할 포터는 약속된 시간보다 더 일찍 숙소에 와 있었다. 이름은 하루카.

▲ 숫기도 없고 말도 없는데 웃음은 많았던 포터 하루카
까무잡잡한 얼굴에 자그마한 몸집을 가진 하루카에게 커다란 배낭을 넘겨주기가 미안했다. 그래도 산에서 다져져서 그런지 몸은 다부져 보인다.

밤새 내린 비에 낮게 안개가 깔렸다. 배웅하러 나온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리치`를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러둔다. 리치(leech)..거머리라는 뜻이다. 우기에 트레킹을 하려면 거머리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트레킹의 출발지점인 페디까지 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산행 시작이다. 초반에는 수십개의 가파른 계단을 쉴새없이 올라야 하는 코스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트래킹 시작한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무릎이 쑤셔오기 시작한다. 그래도 고도를 높여갈수록 눈 앞에 펼쳐지는 전경은 감탄스러움을 더했다.

계단 코스가 끝나자 걷기 편한 평지가 잠깐 이어지는 듯 하더니 이제는 정글 코스다. 좁은 길을 따라 주렁 주렁 드리워진 덩쿨에다, 밤새 내린 비 때문에 원시 열대림을 걷는 기분이 든다. 가끔 얼굴이 간지러워서 보면 어디서 묻었는지 거미줄이 드리워져 있다.

일행 중 한명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발목까지 오는 양말에 물든 선명한 핏자국. 넘어진 적도 없고 까진 적도 없는데 꽤 피가 많이 난 모양이다. 하루카가 신발을 벗어보라고 한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큰 비명소리가 들린다. 양말 속에서 지렁이를 10분의 1로 잘라놓은 듯한 벌레 한마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거머리란다.

▲ 안나푸르나 트래킹중 평지 코스, 유유히 풀을 뜯는 소팔자가 부러웠다.
`거머리가 이렇게 생겼구나` 신기함도 잠시, 허겁지겁 나의 발목은 안전한가 확인해봤다. 다행히 아직은 무사하다. 이미 피를 많이 먹었는지 빵빵해진 거머리를 하루카가 떼어줬다.

이제부터는 앞을 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발만 보고 걷는다. 그전까지는 몰랐는데 이제 나무 밑둥에 붙어있는 거머리, 나뭇잎 끝에 고개를 쳐들고 있는 거머리, 바위 위를 기어가는 거머리 등 온통 거머리만 눈에 들어온다.

수시로 신발을 체크해가면서 걸으려니 산행이 열배는 힘들어진 듯 하다. 어느덧 점심 시간이 됐다. 한 롯지에 들어가 점심을 시켰다. 우기라 그런지 롯지에는 우리 일행 뿐이다.
갑자기 창 밖에서 무섭게 비가 쏟아진다. 장대비다. 비를 피해 두명이 롯지로 뛰어들어왔다. 롯지 주인은 서양인 남자를 보자마자 양말을 가르키며 `리치!` 하고 외친다. 이 남자는 한두번이 아닌듯 능숙하게 거머리를 제거했다.

점심을 다 먹었을때쯤 비가 그쳤다. 다시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로는 비촉데우랄리를 정했다. 앞을 보고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발을 내려다보고 거머리가 붙었는지 확인하는 식으로 2시간을 걸었다. 드디어 목적지 도착.

이곳 롯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물도 어디서 떠온 물을 조금씩 아껴 써야 하는 곳이다. 물론 샤워는 엄두도 못 냈다.

▲ 비수기라 한가한 안나푸르나의 롯지, 여주인이 마당에서 마늘을 까고 있었다.
온 몸이 쑤시는 듯 아프다. 아직 밖이 환했지만 짐을 풀고는 쓰러져 정신없이 잤다. 얼마를 잤을까. 하루카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하루카는 저녁 먹을 시간이라고 했다. 밖이 어둑어둑한 걸 보니 저녁 시간이 맞나보다.

하루카가 안내한 곳은 롯지 가족들이 사용하는 부엌. 투숙객을 위한 식당이 따로 있었지만 워낙 비수기라 손님도 없어서인지 부엌으로 안내됐다. 땅 바닥에 옛날 부뚜막 같은 분위기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탓에 촛불과 호롱불에 의지해야 했지만 여주인은 능숙한 솜씨로 뚝딱 요리를 해냈다.

온 가족이 다 둘러앉아 모두 우리가 밥 먹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시부모, 아들, 며느리, 아이까지 3대가 모여 사는 이 가족에게 비수기에 간간이 찾아오는 우리 같은 손님이 무척 반가웠나보다.

몇 숟가락 못 뜨고 수저를 내려놨다. 아침부터 속이 좋지 않았던 탓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정로환으로 버티고 있던 터였다. 다들 피해갈 수 없다는 `델리벨리`(인도를 찾은 외국 여행자이 걸리는 설사)에 나도 부딪힌 모양이다.

갑자기 뒤가 급해져 한 손엔 후레시, 한 손엔 화장지를 들고 숙소 앞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전기가 없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손이 세개였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볼일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는데 아킬레스건 있는 쪽이 가렵다. 긁적거리는데 왠지 내 피부가 아닌 듯 하다. 어두운 곳에서 촛불에 비춰보니 빵빵해진 거머리 한마리가 떡하니 붙어있는게 아닌가.

정신이 혼미해졌다. 오늘 하루 거머리로부터 잘 방어했다고 자부했는데 잠깐 방심한 사이에 공격을 당한 것이다. 양말도 안 신고 운동화를 구겨신은 채 화장실을 다녀온 게 빌미가 된 모양이다.
▲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롯지, 초와 모기향은 제공해줬다.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떼어냈다. 살려두면 다시 스멀스멀 기어올라 몸에 붙을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고 발로 밟았다. 순간 바닥에는 선혈이 낭자해졌다. 저 것이 다 내 몸에서 나온 피일텐데..

아무리 지혈을 해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아침부터 거의 먹지 못한데다 굶주린 거머리들에게 헌혈까지 하고 나니 갑자기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튿날에는 특단의 대책을 썼다. 바로 스타킹. 일행 중 한명이 거머리를 막는데 스타킹이 최고라는 정보를 듣고 몇개 챙겨온 것이다. 서울 거리에서는 절대 신지 못할 것 같은 국방색 스타킹이다.

양말 안으로 바지를 집어넣고 그 위에 스타킹을 신어 무릎까지 끌어올렸다. 여기에 구두까지 신으면 딱 70년대 아저씨 스타일이다. 폼은 안 났지만 거머리로부터는 확실히 안전했다. 이제는 바닥을 보기보다는 한폭의 수채화 같은 안나푸르나를 감상하면서 트래킹할 수 있는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됐다. 국방색 스타킹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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