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가슴에 큰 상처와 충격을 남긴 `9.11테러`를 소재로 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드디어 베일을 벗었습니다. 니콜라스 케이지와 마이클 페나가 쌍둥이 빌딩서 살아남은 항만 담당 경찰관으로 열연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세계 무역 센터`(World Trade Center)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지난 9일 개봉한 `WTC`는 지난 주말 1990만달러 수입을 올려 미 박스오피스에 3위로 입성했습니다. 제작 초기 `불행을 상품화한다`, `사실은 알려야 한다` 등 논란에 미 전역이 들썩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개봉 성적표는 사회적 관심에 못미치는 수준입니다.
초유의 참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유족들의 따가운 시선이 버거웠던 걸까요? `플래툰`이나 `JFK' 등 사회성 짙은 작품을 통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왔던 감독도 이번엔 아주 안전한 영화를 만들었답니다. WTC는 테러의 인과관계에 대한 고찰없이 애국주의와 인간의 숭고한 희생정신 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유가족들과 적잖은 마찰을 빚었던 `WTC`가 막이 오를 무렵, 전 세계는 다시 한번 테러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지난주 영국에서 미국행 여객기를 공중 폭파하려던 테러 분자들이 체포됐습니다. 미국과 영국이 민간항공기 관련 테러 경보를 최고 수준으로 격상했고 전세계 금융시장은 `잠시` 요동을 쳤습니다.
하지만 시장은 놀랄 만큼 빠르게 평상심을 되찾았고, 비상사태 이후 자연스레 뒤따랐던 `안전자산 선호`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도에서도 테러경계령이 내려졌지만 시장은 "무슨 일 났느냐"며 제 갈길 가기에 바빴습니다.
9.11이후 많은 이들은 세계 경제의 둔화를 염려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외신보도에 따르면 2001년이후 미국 경제는 15% 이상, 개도국 경제는 30% 이상 성장했고, 세계 경제는 20% 이상 확대됐답니다. 수출과 수입 등 국가간 무역거래는 30% 이상 늘었다는군요.
한 전문가는 이 같은 현상은 꼬집어 "9.11보다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에 남긴 상처가 훨씬 크고 깊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내성을 키운 시장과 투자자들은 더 이상 테러에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9.11을 소재로 한 `WTC`가 개봉전 뜨거운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원찮은 성적을 거둔 데서도 알 수 있듯, 일반인들의 관심은 테러에서부터 차츰 멀어져가는 느낌입니다. 감독의 세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참사 속의 영웅이야기 보다 오히려 스포츠 코미디 영화 '탈라데가 나이트'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일방주의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9.11 이후 더 빠르게 보수화됐고, 서방에 거주하는 다수의 아랍인들은 분노의 표적이 됐습니다. 친 아랍파 지식인들은 더 굳게 입을 다물어야 했죠. `WTC` 마저도 왜 그런 참담한 사태가 벌어져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테러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수시로 뒤바꿔 놓으며 불필요한 갈등과 막대한 인적·물적 비용을 초래해 왔습니다.
미국은 9.11이후에 오히려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 더 많은 자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의회는 오는 2015년이면 미국의 전쟁 관련 비용이 800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고, 콜롬비아의 한 민간 연구소는 최소 1조달러로 전망키도 합니다.
천문학적 돈이 투입된 이라크에서는 수만명의 시민들과 수천명의 미군이 죽어 나갔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인 대체 에너지 개발에 이만한 자금을 쏟아부었다면 지구촌은 지금보다 훨씬 살기좋은 세상이 됐고, 보다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을 겁니다.
9.11과 이후 보여온 행태는 테러가 가해자와 피해자(혹은 미래의 가해자) 모두에게 불필요한 희생과 비용만 가중시켜왔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악과 증오의 순환 고리만을 더 길게 이어갈 뿐이지요. 다가올 9.11 5주년은 이 참사의 진정한 교훈이 무엇이었는지를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