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최현석기자]
연초이후 잠잠하던 기업들의 달러 투매 양상이 최근들어 다시 번질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업의 달러 미리 팔기 행태가 완연해지며 외환당국도 시장 수급 파악이나 환율 전망에 애로를 겪을 정도입니다. 외환시장을 담당하는 최현석 기자는 과도한 헤지는 투기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최기자는 기업 경영진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한 수출기업 사무실.
사장: 당신들 뭐 했어. 다른 회사들은 헤지해서 환율 떨어져도 손실 없다는 데 우린 이게 뭐야. 김 차장 당장 사유서 내요.
잠시후 같은 기업내 화장실.
김 차장: 박 대리. 앞으로 영업쪽에서 수출 계약 따오면 바로 바로 헤지하고 말자. 환율 오를지 내릴 지 신경 쓰다가는 우리 목이 열개라도 남아나지 않겠어.
박 대리: 환율이 너무 많이 떨어졌는데요. 세계적 달러약세 분위기도 진정되고 있으니 헤지는 조금 미루는 게 어떨까요.
김 차장: 미루긴 뭘 미뤄. 즉시 해. 안했다가 이번에도 환율 빠지면 우린 모가지야. 헤지했다가 환율 오르면 그때는 시킨 데로 한거니 문제될 것 없잖아. 이게 내돈이야, 자네 돈이야. 어차피 회사 돈이니 그냥 눈 딱 감고 헤지 해 버려.
환율이 급락한 지난해말 수출기업 상황을 가정해 본 시나리오입니다. 가정이기는 하나, 기업들로부터 외환 주문을 받는 은행이나 선물회사 관계자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이런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됩니다.
실제 지난해 10월 이후 올초까지 환율이 1150원선에서 980원대까지 폭락하는 데는 한 대기업의 적극적인 선물환 매도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동안 정부 개입만을 믿고 환위험 관리를 거의 하지 않다가 1140원선이 깨진 뒤 부랴부랴 대규모 매도 헤지에 나서며 환율 급락을 부추긴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업이 그동안 미리 환헤지를 하지 않은 것은 환율이 800원대에서 2000원 부근까지 폭등했던 외환위기 당시 미리 환위험을 헤지했다가 환율 급등의 과실을 따먹지 못했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며 이후로는 헤지를 포기한 채 그날 그날 환전 처리를 한 것이죠.
지난해 10월이후 환율 급락기 동안 선물환 매도헤지에 나선 기업들 가운데 그동안 헤지에 소극적이던 기업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당시 기업들은 다른 기업이 달러를 팔며 환율을 하락시킬 것을 우려해 자신이 먼저 내다파는 소위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버렸습니다.
환율이 980원 수준에서 바닥을 확인한 이후 투기적 매도세가 진정되는 듯 했으나, 최근들어 다시 `묻지마 매도`가 기승을 부리는 모습입니다. 지난해 11~12월 140억달러에 달했던 선물환 규모가 올 1~2월 주춤하다 지난 3월 60억달러 수준으로 늘어난 점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최근 일부 기업 외환 담당자들이 은행 등에 환율 하락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외국계 전망 보고서를 요구하는 모습에서도 `면피성 헤지`의 실태가 엿보입니다.
물론 정상적인 환위험 관리 필요성이야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만 과유불급이란 격언처럼 지나쳐서 좋을 것은 없을 겁니다. 외환당국의 한 축인 한국은행조차 선물환 매도 때문에 환율 예측이 어려워졌다고 실토할 정도라면 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이 위안화를 평가 절상할 지, 절상하더라도 달러/원 환율이 단기 급락할 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2~10년 뒤 받을 달러까지 미리 내다파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 관계자의 경고처럼 환율이 일정수준 위로 올라설 경우 980원선 부근에서 헤지했던 기업들은 환평가손은 차치하고서라도 헤지비용과 함께 원자재 수입비용 상승 등으로 손실을 입을 수 있습니다.
기업 외환 담당자들도 할말이 많습니다. 믿었던 정부는 엉뚱한 개입으로 신뢰를 잃은 데다 밖에서 미국은 중국에 대고 위안화 절상 안하면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고 하니 달러 매도 헤지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선물환을 거래에 나서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책임 문제 때문입니다. 앞에서 든 사례처럼 헤지를 하던 안하던 환 평가손을 입을 경우 책임은 결국 담당자한테 돌아오니 책임을 피할 방법만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980원선에서도 기업들이 `팔고 보자`고 나선 데는 기업 경영진의 인식이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환위험 관리는 본전만 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때 그때 실적에 따라 담당자를 문책하면 `막차 타기`로 불리는 뒤늦은 헤지로 더 큰 손실만 초래할 수 있습니다.
외환위기때 본 것처럼 환율은 단순한 평가손익을 떠나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상시 환율 논의 체제를 마련하고 컨설팅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