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한국판 버핏' 꿈꾸다 탈 난 대한전선, 건설사 품으로

M&A '큰손' 대한전선이 현재에 남긴 시사점은?
  • 등록 2021-03-31 오전 11:01:05

    수정 2021-04-01 오전 11:29:33

[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이 기사는 이데일리 홈페이지에서 하루 먼저 볼 수 있는 이뉴스플러스 기사입니다.

개인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유튜브 영상이 있다. 10년 전 올라온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 주식 방송 분석하다가 X분노함’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한 주식 전문가는 발끈한다.

“대한전선 지분 53%를 가진 대주주들이 나머지 47% 개인 (주주들의) 돈 가지고 에쿠스 타고 다니면서 나쁜 짓 다 했죠. 이 회사가 인수·합병(M&A)한다고 생쇼를 하고 안 산 회사가 없습니다.”

한때 10만원에 육박했던 대한전선 주가가 회사의 투자 실패로 1만원 밑으로 곤두박질하자 대주주를 향해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대한전선은 이때부터 10년 넘게 경영 정상화를 거치고 최근에야 새 주인을 찾았다. 31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오는 5월 말 대한전선 최대 주주가 호반건설 계열사인 호반산업으로 바뀔 예정이다. 기존 최대 주주인 경영참여형 사모펀드(PEF) 운용사 IMM 프라이빗에쿼티(PE)가 보유 중인 대한전선 지분 40% 모두를 2518억원에 호반산업에 매각하기로 해서다.

대한전선 내력을 잘 아는 한 업계 관계자는 “전선에서 시작해 한때 남광토건, 명지건설 등을 인수하며 잘 나갔던 대한전선이 지금에 와서는 주택 사업 외길을 걸은 건설사에 인수된 모양새”라고 했다.

그래픽=이동훈 기자
◇ 대한전선, M&A 시장 ‘큰손’에서 부실기업으로


건설 먹고 탈 난 대한전선이 다시 건설사 품에 들어가는 기업사(史)의 아이러니라는 이야기다. 사실 대한전선이 전성기에 인수했던 것은 건설사뿐 아니다.

대한전선은 1955년 국내 최초 전선회사로 설립돼 무려 54년 흑자(당기순이익)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국내에서 손꼽는 재벌그룹으로 이름을 날렸다. 2000년대 들어서는 사업 다각화로 눈을 돌렸다. 전선 사업의 수익성이 낮아지자 그간 벌어들인 돈으로 투자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대한전선의 한 임원은 2004년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존 재벌의 사업 다각화 전략 차원이 아니라 수익 다각화 차원에서 기업을 인수하고 있다. 미국의 전설적 투자가인 워런 버핏이 이끄는 투자회사인 버크셔 해서웨이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대한전선은 경영 참여 대신 투자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판 버크셔 해서웨이 또는 일본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그룹과 같은 투자 기업으로 변신하려 했다. 이후 정말 안 산 회사가 없다.

임종욱 대한전선 사장이 2005년 창립 50주년 기자 간담회에서 했던 말이 상징적이다. 그는 “한 우물만 파는 시대는 끝났다”며 “한 우물만 파다가 망한 기업도 많다”고 했다.

2002년 무주리조트를 시작으로 2004년 쌍방울, 2005년 대한위즈홈과 한국렌탈, 2007년 이탈리아 전선업체인 프리즈미안(소수 지분 인수), 명지건설, 대경기계기술, 캐나다 밴쿠버 힐튼호텔, 2008년 남광토건, 온세텔레콤, 선운레이크밸리 골프장 등을 줄줄이 사들였다.

서울 남부터미널 등 부동산은 물론 소주 업체 진로의 채권까지 투자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진로와 하나로텔레콤 인수전에도 뛰어들었다. 대한전선은 당시 국내 M&A 및 자산시장에서 ‘큰손’ 대접을 받았다.

그래픽=김정훈 기자
문제는 빚으로 쌓아 올린 부(富)였다는 점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 100%대에 불과했던 대한전선의 부채비율은 2000년대 말 500% 선으로 치솟고 이후 1000%를 넘어섰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찾아오자 자산시장이 침체하고 투자한 회사들도 줄줄이 부실에 빠지며 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대한전선은 2009년 첫 당기순손실을 기록하고 지난해 순이익으로 전환하기까지 11년간 연속 적자를 냈다. 2015년 대한전선 최대 주주로 올라선 IMM PE도 “지난 5년간 회사의 비핵심 자산을 정리해 부채비율을 낮추고 실적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대한전선의 회계 장부에는 경기상호저축은행, 영남상호저축은행 등 부실 투자 자산이 남아있다.

‘가치투자’ 시동 거는 대기업…대한전선 실패 교훈 삼아야

그래픽=김정훈 기자
대한전선의 사례는 현시점에도 교훈과 시사점을 제공한다. 국내 많은 대기업이 투자회사로의 변모를 선언하며 M&A 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있어서다.

‘전문 가치 투자자’를 청사진으로 내건 지주회사 SK(034730)와 그 뒤를 따르는 LG(003550) 등이 대표적이다. 기업 지분을 인수해 실제 경영에 참여하는 전략적 투자자(SI)를 넘어서 시세 차익을 목표로 하는 재무적 투자자(FI) 영역까지 사업을 확대하며 대기업이 사모펀드(PEF)와 비슷한 자산운용업에 뛰어들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 신용평가기관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국내 재벌 그룹 지배구조의 중심에 있는 지주회사(다른 회사를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가 단순히 자회사로부터 배당이나 수수료를 받는 등 소극적인 경영을 했지만,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김장원 IBK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지주회사 SK 등은 자체 사업은 물론 계열사로부터 올라오는 자금이 많은 만큼 기존 소극적 지주사에서 벗어나 그룹의 투자 기조를 결정하고 계열사와 동반 투자에 나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사업 확장 과정에서 불확실성과 리스크(위험)는 당연히 뒤따르기 마련이지만 그룹의 사업과 연관성 높은 사업 분야에 주로 투자하는 만큼 투자 실패 위험이 커보이진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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