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는 홍모씨로부터 현금 8000만원을 외환은행 은행장실에서 받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절대로 그런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서울중앙지방법원 311호실 피고석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지난 2003년 2월 28일 외환은행 행장실에서 벌어졌던 상황에 대해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다.
준 사람만 있고 받은 사람은 없다?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헐값 매각해 수천억 원대의 손실을 입힌 혐의를 받고 있는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이 이보다 우선 기소돼 1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장성원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알선수재 혐의 첫 재판에서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했다.
외환은행의 차세대 뱅킹 시스템 구축에 참여하려는 업체로부터 금품을 주고받은 혐의로 법정에 서게된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과 C업체 대표 홍모씨. 두 사람간의 거리는 불과 1m도 되지 않았지만 서로가 주장하는 진실의 거리는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났다.
홍씨는 강남에 있는 G백화점에서 97만원을 주고 외제 화장품을 구입한 뒤 화장품이 든 쇼핑백에 따로 현금 1000만원을 채운채 이 전 행장을 만났다.
홍씨는 첫 만남을 가진 외환은행 행장실에서 "처음에 빈손으로 오기 뭣해 사모님 화장품이나 선물로 사왔다"며 천만원어치 돈다발을 이 전 행장에게 건넸다고 시인했다.
5000만원을 건넬 당시 이 전 행장이 "지난번 것도 고맙고 형님을 도와준 것도 고마운데 뭘 또 사오시냐"고 감사를 표한 것 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홍씨의 주장에 대해 이 전 행장은 "홍씨가 자신에게 화장품을 준 기억은 잘 나지 않으며 돈을 받은 적은 전혀 없다"고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홍씨가 무언가 부탁을 하지 않았냐는 검찰의 질문에 대해서는 홍씨가 IT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를 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이 전 행장은 홍씨가 자신의 형에게 2000만원을 준 사실도 공소장을 보고 알았으며 홍씨가 5000만원을 줬다고 주장한 지난 2003년 6월달에 홍씨로부터 어떤 부탁을 받았는지도 기억이 안난다고 진술했다.
이 전 행장과 홍씨 둘 중 누가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는 법원이 판단할 문제겠지만 외환은행이라는 거대 국책은행장까지 역임한 이강원 전 행장의 기억력이 실망스러운 수준이란 점은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