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때 장롱 속 금을 헌납해버린 중생들로선 배만 아플 따름이다.
그러나 어찌하리. 나라가 파탄나게 생겼다니 꽁꽁 숨겨뒀던 돌반지를 다 털어먹었어도 후회는 없다.
서민들의 십시일반으로 외환위기는 그럭저럭 넘겼다. 그런데, 우리네 중생들 인생은 왜 이리도 꼬이나.
소비를 일으켜야 한다고 빚내서 카드 쓰자고 나팔부는데 순진하게도 넘어가, 2002년 신용카드 사태를 맞았다.
지금 와서 그 때 일 들춰내 뭐가 좋겠느냐마는, 그래도 약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어 화병이라도 면해볼려면 찬 소주에 안주라도 삼아봐야 할 듯 하다. 아무리 새 나랏님이 `과거는 묻지 말라` 하시어도 말이다.
사실, 2002년 카드대란의 징후는 1년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금융시장과 금융감독을 책임지고 있는 금융감독당국이 당시 기자들에게 뿌린 보도자료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금융감독원은 2001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6개 전업카드사를 대상으로 법규준수 실태파악에 나섰다. 이미 이 때부터 신용카드사들의 과열경쟁은 위기감을 불러왔다.
이듬해 1월 10일. 금감원의 경고에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금감원은 신용카드 발급기준 강화를 이유로 8개 전업카드사와 18개 신용카드 겸영은행 카드 담당 임원회의를 소집한다.
예나 지금이나 서슬퍼런 감독당국이 각 금융회사의 담당 임원들에게 금감원으로 들어오라는 조치를 내렸으니 경고의 강도가 높아진 셈이다.
그 해 2월 21일. 다시 금감원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거리에서 카드회원을 모집하는 행위를 중지하라고 했으나, 지켜지지 않고 있으니 모든 가두모집 가판대와 모집인을 지금 당장 철수시키라는 명령이다. 이는 각 금융회사에 문서로 시달됐다.
그러면서 감독당국은 이 같은 과당경쟁을 방지하는 내용의 제도적 정비방안도 마련했다. 부당한 신용카드 발급에 대한 카드사의 책임을 강화하고 모집인 등록을 의무화하며, 현금대출 위주의 영업행태를 차단하고, 대손충당금 적립기준도 강화하겠다는 내용들이다.
이 방안은 그 해 2월 14일 처음으로 발표되고 이후 제도정비를 시작했으나 정비된 제도가 시행된 것은 그 해 7월 1일부터다. 제도정비에 무려 5개월이 걸렸다.
왜 이리 됐을까.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금융감독과 관련된 규제의 제·개정은 규제개혁위원회와 협의하도록 돼 있다. 말이 협의지 규개위에서 오케이하지 않으면 시행이 불가능하다.
당시 규개위의 입장은 간명했다. 신용카드사에 대한 카드모집 형태, 즉 거리모집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민간업계의 마케팅을 제약하는 과도한 규제라는 것이다.
규정 개정안을 들고 규개위를 찾아간 당시 공무원들은 금융시장에선 시시각각 이상징후가 확인되는데도, 규개위 민간위원들과 논쟁을 하느라 그 해 하반기 들어서야 규정을 개정할 수 있었다.
당시 대책마련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금융시장에선 하루가 다르게 분위기가 바뀌는데, 그들(규개위 민감위원들)은 당시 삼성과 LG등 전업계 카드사들이 써 준 문서만 앵무새처럼 읽을 뿐, 금융시장의 동향과 감독당국의 경험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다른 관계자도 "그들은 규제가 무엇인지, 규제완화는 왜 필요한지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공무원은 나쁜 사람, 민간업체는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만 있었던 것 같다"며 "규제완화와 업계 편을 드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힐난했다.
결국 시간은 흘러흘러 시장은 이미 망가지고 나서야 대책은 시행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드채권 `폭탄 돌리기`를 시작으로 소위 말하는 카드대란은 오고야 말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 때부터 규제완화를 MB 키워드로 제시했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내정자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출신으로 규제완화의 적격자라는 평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나라 카드사태 당시 규제개혁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위원회의 민간위원들을 이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