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지하 700m 갱도에 갇힌 광부 33인의 극적 구출 과정을 유일하게 현장에서 지켜본 영국 가디언지 기자 조나단 프랭클린은 이데일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칠레가 당시 참사를 슬기롭게 극복해낸 비결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이데일리가 지난 11~12일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개최한 제5회 세계전략포럼에 참석했던 프랭클린 기자는 포럼 참석 이전부터 “세월호 참사로 지친 한국 국민들에게 칠레 사고를 취재하며 느낀 교훈과 경험을 들려주고 싶다”며 적극적인 의지를 피력한 바 있었다.
지구 정반대에 있어 우리와는 계절도, 시간도 정반대인 칠레에서 지난 18년 간 특파원으로 생활했던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바로 세월호 참사였다.
“세월호 사태를 절대로 잊지 말고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한 그는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칠레 광산 매몰 사건에서 어떻게 단 한명도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다양한 예를 통해 들려주었다.
|
1100명의 기자 중 유일하게 구조 현장에 직접 참여했던 프랭클린은 위기관리에 취약한 칠레에서 광부 33명을 온전하게 구할 수 있었던 원인이 리더십에 있었다고 진단했다.
당시 광부들의 작업반장이었던 우르수아는 굶주린 33명의 거친 성인 남성들을 지하 세계에서 다룰 방법이 민주주의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우두머리라는 권위를 버리고 매일 정오에 투표로 모든 것을 결정했다. 누가 어느 곳에서 잘지, 어느 부분을 드릴로 뚫을지 등 사소한 일도 한 달 반 경력의 19살 신입부터 51년 경력의 63살의 광부 모두에게 1인1표의 동등한 발언권을 부여해 물었다.
프랭클린은 “광부 세계에 있어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며 “하지만 이들은 절대복종을 버리고 투표라는 새로운 규율을 정했다”고 말했다.
지상에서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피녜라의 리더십이 빛났다. 프랭클린은 “정해진 방법은 없다”라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도움이 되는 모든 사람과 방법을 다 동원했던 피녜라 대통령의 사업가적 마인드가 사건 해결이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대통령은 사고 대책반을 마련해 전문가가 추천한 한 가지 방법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붓기 마련이다.
◇ 끊임없는 소통..억센 33명을 묶은 힘
썩은 물과 우유, 참치 통조림 몇 개로 두 달을 버텼던 33명의 광부들을 단결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비결은 ‘소통’ 이었다.
프랭클린은 “만일 누군가가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고 말한다면 나를 그에게 칠레 광산 사고 현장을 살펴보라고 말할 것이다”라며 “학력 수준이 낮고, 험한 일을 하는 광부들이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소통의 힘이 컸다”고 말했다.
광부들은 한 수저의 참치 캔을 먹을 때도 기도하고, 서로의 감정을 나눴다. ‘신부님’ 역할을 맡은 선배 광부가 복음주의 설교를 들려주면, ‘기록자’ 역할을 맡은 후배 광부가 설교 내용과 광부들의 하루 일지를 적으며 죽음을 준비하는 식이었다.
굶어 죽기 직전이었지만 엄마가 해주신 밥, 동네 샌드위치 등 자신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한 명씩 돌아가며 얘기하다보면 때로는 유머있게 장난을 치기도 하고, 지난 얘기에 함께 울기도 했다.
이런 소통의 힘은 피부병, 악취,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그들에게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게 한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프랭클린은 한국 사회가 안전 사회로 거듭날 수 있는 길도 소통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국민들이 문제점과 가해자를 비난하는 데만 열을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사고 자체를 원천 봉쇄할 수는 없는데 오히려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고 언급했다.
이어 “안전 사회를 만들기 위해 완벽히 통제를 하려거나 가해자 처벌에만 몰두하면 안된다”며 “안전한 사회는 민주주의 뿌리가 확고하고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문화를 통해 만들어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 특종 욕심 이해하지만 인권보호 우선
칠레, 멕시코, 미국 등 지난 20년간 세계를 누비며 취재한 프랭클린은 세월호 사태로 비난받은 한국의 언론 후배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그는 광산에서 탈출한 광부들이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에 앞 다퉈 자신의 영웅담, 사생활 등을 털어놓았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가미카제 특공대’라고 부를 정도로 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마약, 술, 불륜, 자살 등 다양한 충동에 시달렸고,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기 위해 이를 기사화하길 원했다.
프랭클린은 “만일 저널리즘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7명의 애인이 있다고 자랑했던 유부남이나 약물 중독과 자살 충동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했던 그들의 얘기를 서슴없이 기사화했을 것이다”라며 “그러나 언론인들은 자신의 기사가 때로는 사람의 생명도 끊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피해자들은 일상적으로 파파라치에 시달리는 스포츠 스타가 아니다. 우리 옆집에 사는 평범한 아저씨, 평범한 학생이다”라고 설명했다.
남들이 안 쓰는 기사, 자극적인 기사를 쓰고 싶은 욕심으로 취재원의 인권을 침해하는 기사를 쓰면 안된다고 재차 지적한 그는 “만일 내가 안 쓴다면 어차피 다른 사람이 기사화 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랭클린은 언론 보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 통합에 있다고 전했다.
“대형 참사 보도는 종종 목적의식을 잃게 된다. 사고를 통해 더 안전한 사회를 모색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갈등을 봉합하는 일을 해야 하는 언론이 서로를 비난하며 갈등을 더 키우는 일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결국 언론이라는 통로를 통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고 서로를 인정하고 통합하게 하는 것이다”
|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거주하면서 영국 ‘가디언‘지의 남미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64년 미국 뉴햄프셔주에서 태어난 프랭클린은 명문 브라운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베이가디언과 보스톤글로브, 플레이보이 등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현재 가디언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칠레 현지에서 ‘어딕트빌리지닷컴’(www.addictvillage.com)이라는 뉴스 사이트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프랭클린은 2010년 8월 5일 칠레 산호세 광산 붕괴사고가 발생하자 칠레 당국으로부터 어렵게 ‘구조대원‘ 신분증을 얻어 현장에서 심층취재를 했다. 갱도에 갇힌 광부들의 생활모습에서부터 심경의 변화, 가족들의 사연, 구조당국의 수많은 아이디어와 구조노력, 시행착오 등을 기사로 생생하게 담아냈다.
그는 칠레 대통령과 구조대원, 기술자, 가족, 구출된 광부 등 120여명과 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The 33’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은 한국어를 비롯해 19개 언어로 번역됐으며 미국과 영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