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분단 아픔 공감한 멀린스…"못 이겨낼 건 없습니다"

  • 등록 2015-10-21 오후 12:22:15

    수정 2015-10-21 오후 1:45:37

에이미 멀린스가 20일 서울 서초구 세빛섬에서 열린 ‘이데일리 세계여성경제포럼(WWEF) 2015’에서 이데일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한대욱 기자
[이데일리 권소현 기자]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은 두 명의 한국 군인을 만나고 온 날 마음이 안 좋아 저녁도 못 먹었다고 했다. 젊은 이들을 자신과 같이 의족을 껴야 하는 신세로 만든 분단 국가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당초 예정에 없던 비무장지대(DMZ)까지 찾았다.

지난 20일 서울 서초구 세빛섬에서 열린 ‘이데일리 세계여성경제포럼(WWEF) 2015’에 기조연설자로 나선 에이미 멀린스(39·사진) 모델 겸 배우는 처음 찾은 한국에서 기쁘면서도 슬펐다고 밝혔다.

197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알렌타운이 고향인 멀린스는 무릎 아래 뼈가 없이 태어나 한 살 때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그는 나무 의족에 의존하는 신세가 됐지만 모든 역경을 이겨내며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장애인올림픽에 참가해 육상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 그는 현재 모델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18일 한국에 도착해 바로 다음 날 국가보훈병원을 찾았다. 이날은 DMZ 수색 도중 목함지뢰로 다리를 잃은 김정원(23) 하사와 하재헌(21) 하사가 처음으로 의족을 끼고 두 다리로 딛고 일어선 기념비적인 날이다. 그녀는 바지를 걷어올려 자신의 의족을 보여주며 세상에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은 없다고 위로했다.

멀린스는 “이들은 스스로 다쳤다거나 신체가 손상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긍정적이고 창의적이까지 했다”고 전했다. 두 하사는 ‘3D프린터를 통해 군복에 어울리는 의족을 만들 수 없을까, 빨간 옷에는 빨간 의족을 끼는 게 어떨까’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을 정도로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긍정의 마인드라면 ‘장애’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그래서 이들이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문제는 이들이 힘들고 어려울 것이라는 사회의 편견입니다. 장애인 다리를 쳐다보지 말라거나 언급하지 말라는 것이 언뜻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 같지만 그다지 이득이 되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

두 하사에 대한 얘기는 자연스럽게 분단국가인 한국의 현실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그녀는 한국에 와서 접한 한 노인의 얘기가 인상 깊었다며 들려줬다. 그 노인은 6.25 전쟁중 남쪽으로 피난왔는데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 얼굴을 뵙는 것이 평생의 꿈이지만 본인 생애에서는 일어날 수 없고 손녀딸 세대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는 것이다.

멀린스는 “어느 나라나 분단의 아픔을 겪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며 “특히 북한 주민이 정치적으로 압박받고 가난 속에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DMZ를 방문해 국경 너머로 북한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살짝 상기된 모습이었다. 멀린스와 인터뷰한 날은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이뤄진 날이기도 했다.

멀린스는 정신적으로 강해지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의족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긴 적이 없었다. 탄소섬유로 만든 의족을 하면 마치 영화 ‘로보캅’ 같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그래도 반바지나 핫팬츠를 즐겨 입었다. 그게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한 스스로 장애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별로 없다. 의족은 패션 아이템 정도로 생각한다는 얘기다. 멀린스는 “처음에는 의족을 낀 모델이 런어웨이에 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며 “그런데 문득 모델 중에 코를 세우고 턱을 깎은 사람도 있는데 무릎 아래를 절단한 나와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자신감은 멀린스를 런어웨이에서도 당당한 모델로 만드는데 도움을 줬다.

그녀는 “실질적인 문제는 신체가 아닌 마음에 있다”며 “거식증, 폭식증, 우울증 이런 병이 모두 마음의 병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멀린스는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것도 자신감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남들과 비교해 긍정적인 개선이 이뤄진다면 괜찮지만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 시작된 비교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다만 장애인이 스스로 장애를 의식하지 않고 살려면 사회 협조가 필요하다는 게 멀린스 주장이다.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인도 방갈로르 국제공항 화장실 사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사진 속에는 ‘Differently abled’라고 표기된 장애인용 화장실 문이 찍혀 있었다. 멀린스는 “장애인이라는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심지어 ‘짓이겨진’(mangled)이라는 표현까지 나오는데 굉장히 절망스러웠다”며 “모든 사람이 ‘능력이 다른’(Differently abled)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면 상당히 진보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애인뿐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그녀는 지금처럼 여성에게 좋았던 시절은 없었다고 답변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있고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glass ceiling: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막는 조직 내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지만 부모님 세대와 비교하면 훨씬 나아졌다는 뜻이다.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와 ‘물이 반이나 남았네’ 중에 멀린스는 후자에 무게를 두는 긍정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멀린스는 “(고(故) 스티브 잡스가) 차고에서 세계적인 정보기술(IT) 업체 애플을 만든 시대”라며 “여성들 스스로 더 많은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특히 한국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한국이야말로 여성에게 기회를 주는 나라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멀린스는 미국 민주당 유력 경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前) 국무장관의 열혈 지지자로 미국에서도 조만간 첫 여성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그녀는 여성으로 사는 데 있어 능력 못지않게 배우자 선택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좋은 배우자를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멀린스는 좋은 팀메이트(team mate)를 찾으라고 조언한다. 육아든 가사든 팀이 돼 같이 할 수 있는 동료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녀는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많은 조건들이 충족돼야 한다”며 “나를 많이 웃게 하고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끌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멀린스는 미국 TV 드라마 ‘홈랜드’로 인기를 끈 배우 루퍼트 프렌드와 지난해 약혼했다. 이번에 멀린스와 함께 한국을 찾은 프렌드는 포럼 행사장에서도 분주하게 오가며 멀린스를 살뜰하게 챙겼다. 그는 멀린스가 기조연설을 할 때 직접 파워포인트를 넘겼고 자신이 부각되는 건 원치 않는다며 사진을 빼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멀린스는 “때때로 짐을 덜어주고 무게저울 추 하나를 들어줄 파트너를 찾았을 때 내 스스로 더 나은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다”며 “나는 그 파트너를 찾았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만큼 출산과 육아에 대한 얘기에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멀린스는 “여성은 육아를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며 “아들이 태어난다면 훗날 그의 아내가 양육과 가사를 모두 책임지게 하지 않도록 교육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에이미 멀린스는?

선천적 장애인 비골무형성증을 갖고 태어나 한 살 때 무릎 아래를 절단하고 의족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미국 명문 조지타운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평범한 대학시절을 보내던 멀린스는 1996년 애틀란타 장애인 올림픽 미국 국가대표로 출전해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미국 시사잡지 라이프(Life)에 그녀 얘기가 소개된 후 전 세계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각종 잡지 표지모델로 러브콜을 받던 그녀는 1999년 영국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의 패션쇼를 통해 정식 모델로 데뷔했고 배우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그녀는 또 미국 피플지(誌)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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