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신냉전 구도가 ‘미 주도의 서방 대(對) 중·러’로 뚜렷해지면서 우리 기업들의 설 곳이 더욱 좁아지고 있다. 자유주의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시대가 끝나고, 미국과 유럽이 밀접하게 연결되는 동시에 다른 한쪽은 중국과 러시아가 결합한 새로운 미·중 양극체제가 형성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서다. 지난 20년간 한국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우리 기업에 대한 피해도 최소화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지 못하면 ‘국제적 왕따’가 될 처지다. 한국의 외교·안보 입장 변화에 따라 우리 기업들의 활동 무대도 뒤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현철 서울대 일본연구소 소장(전 청와대 경제보좌관)은 “공급망뿐만 아니라 투자도 이제는 자유주의 권역과 중국·러시아 권역으로 나눠 관리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며 “우리나라는 미·중 사이에서 세심한 전략을 짜야 한다”고 했다.
중국은 이미 ‘꿈의 시장’이 아닌 지 오래다. ‘공동부유’를 앞세운 시진핑 정부의 막무가내식 규제에 기업 환경이 한 치 앞을 예견할 수 없는 안갯속에 빠졌기 때문이다. 반도체·전기차 등 주력 산업에서 핵심 부품의 70% 이상을 자급자족하겠다고 선언한 중국 정부의 자국 우선주의에 우리 기업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여기에 미국은 동맹국에 중국에 대한 첨단 기술을 반입을 금지해달라고 요구까지 한 상황이다.
심지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리스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는 지난달 19일 “우크라이나가 위기에 처하면 그 충격은 전 세계로 퍼져 메아리로 들릴 것”이라며 “대만과 동아시아에서 그 메아리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CNN 타운홀 행사에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때 미국이 방어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 그렇게 할 책무가 있다”고 답했다. 가능성은 작지만,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에 ‘차이나 리스크’는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
재계는 다자무역체제 변화에도 주목하고 있다. 지난달 1일 세계 GDP(30.8%), 인구(29.7%), 무역(31.9%)의 약 30%를 차지하는 최대 메가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발효됐다. 하지만, 열흘 뒤 미국은 바이든 행정부판 인도태평양 전략서를 발표하고 올해 상반기 중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출범을 예고했다. IPEF는 중국 주도의 RCEP을 견제하고자 미국이 내민 ‘비장의 카드’다. 다자주의에 기반한 자유무역에서 안보 논리가 지배하는 폐쇄적인 공급망 짜기로 ‘통상 판’이 바뀌는 셈이다. 한국이 어떤 판에 끼느냐에 따라 우리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최윤정 세종연구소 신남방협력연구센터장은 “자유무역 혜택의 축소와 역내 무역 왜곡, 아세안 중심성의 훼손과 불이익, 국내 산업경쟁력 저하 등을 야기할 공산이 크다”며 “공급망 협력을 총괄할 수 있는 청와대 직속 통합 조정기구의 설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