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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양’은 기계처럼 성실하고 주어진 것에 충실하다. 창고 밖 세상에 대해 굳이 궁금해 하지 않는다. 정리와 정돈으로 채워진 일상에 만족한다. 그러나 ‘기임’은 자양과 반대되는 성격을 가졌다. 감정적이고 들떠 있다. 창고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창고의 정리된 질서가 숨막힌다. 일에서는 아무런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술과 유흥이 좋지만 자양은 ‘의붓엄마’처럼 맨날 잔소리다.
상징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무대처럼 극의 내용 역시 관념의 독백과 일상의 대화로 뒤엉켜 있다. 특히 자양의 모습을 통해 거대한 구조 속에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과 자괴감이 도드라진다. 해장국을 끓이기 위해 챙겨놓은 북어대가리를 보며 털어놓는 자양의 독백에서 이러한 주제의식은 별다른 꾸밈없이 노출된다. 덕분에 부조리극에 가깝지만 극의 메시지가 비교적 명료하게 드러나 난해하거나 머리가 아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묵중한 울림을 바란다면 기대치를 조금 낮추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