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퇴임한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과 후임 김용덕 금감위원장이 `금산분리` 문제에서 대립각을 세우면서 항간의 화제가 됐습니다.
윤 위원장은 역대 금감위원장 가운데 처음으로 임기를 채운 금감위원장이란 기록과 `소신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화려하게 물러났는데요. 퇴임 당시 윤 전 위원장은 금산분리 완화라는 평소 소신을 시장에 화두로 던지면서 논쟁을 촉발했습니다.
전임자 명성만으로도 적지않은 부담을 느꼈을 김 위원장은 이 논쟁까지 갈무리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김 위원장은 "금산분리를 완화해서는 안된다"며 반대 의견을 표시했죠.
이처럼 후임자에겐 자신의 미숙함보다 전임자의 명성과 그 존재가 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이같은 상황이 미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재연됐습니다.
`연준의 모호한 어법(Fed Speak)`이란 전형을 세운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은 지난해 1월 월가의 박수를 받으며 18년 임기를 마쳤습니다. 후임 벤 버냉키 FRB 의장은 자리가 주는 무게와 함께 `마에스트로`로 불렸던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 총재`의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압박도 함께 받아야 했습니다.
월가의 호사가들은 취임 초기에 종종 버냉키 의장을 노련한 그린스펀 전 의장과 비교하며 못마땅해 했고, 버냉키는 취임 직후 마리아 바티로모 CNBC 앵커와 금리인상 발언 인터뷰 탓에 앞으로 입조심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하는 `굴욕`까지 당했습니다.
쉴 틈이 없습니다. 그린스펀 의장은 지난 5월부터 현재까지 ▲아시아 자산위기, ▲중국 증시 폭락 가능성, ▲영국 부동산 문제, ▲미국 집값 하락과 경기침체 가능성 등 민감한 문제들을 차례로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그동안 다소 뜨문뜨문 발언에 나섰던 그린스펀 전 의장은 `격동의 시대(The Age of Turbulence)` 출간 전후로 가진 인터뷰에서 아예 맘먹고 `독설가`로 변신한 듯 합니다. 9월 금리인하 결정을 지지한다거나 FRB의 물가안정 목표 설정에 반대하는 등 도를 넘는 발언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난 2월말 경기침체 발언은 전세계 증시 급락을 초래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지만, 수다스러워진 만큼 발언의 무게는 다소 덜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가운데 그의 `과도한` 저금리 정책이 주택경기 거품을 촉발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을 수수방관했다는 비난이 다시 목소리를 키우고, `그린스펀 신화`에 대한 월가의 각성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전임자는 자리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임기중 세운 명성과 풍부한 경험으로 재직에 준하는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언론이 중요한 시기마다 전임자의 발언을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죠.
그렇기 때문에 후임자에겐 일종의 `의무`가 있습니다. 현직에 있는 후임자가 섣불리 말할 수 없는 문제점을 수면 위에 올려 해결로 이끄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버블도 반기는 월가와 버블을 조절해야 하는 FRB 사이에서의 중재자도 그린스펀 전 의장이 적역 아닐까요.
반면 후임자의 직무 수행에 `덫`이 될 수 있는 발언은 자제해야 할 겁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의 왕성한 대외 활동이 그의 친정 FRB와 버냉키 의장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될지는 자명합니다.
영란은행의 머빈 킹 총재가 "나의 전임자인 에디 조지 전 총재에게 감사한다"며 "그가 공식 석상에서 통화정책위원회의 활동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나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한 발언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