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잃은 한국은행`으론 경제에 희망이 없다

  • 등록 2003-05-09 오후 4:25:10

    수정 2003-05-09 오후 4:25:10

[edaily 안근모기자]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는 말과 행동이 항상 일치하는 전통(history of matching deeds to words)에 의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일관되게 말한 대로 행동하는 중앙은행은 제도나 조직이 어떻게 돼 있든지간에 진정한 신뢰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앨런 S. 블라인더 전 미국 연준 부의장(현 프린스턴대 교수)이 지난 98년 84명의 각국 중앙은행 총재와 53명의 경제학자를 대상으로 `중앙은행 신뢰성 확보방안`을 설문조사한 뒤 결론내린 말이다. 우리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일개 특수법인이자, 광의의 정부기관중 하나에 불과한 한국은행의 신뢰 추락을 우려하는 것은 그 것이 장차 우리 국민들에게 불필요하게 지울 엄청난 부담 때문이다. 신뢰없는 중앙은행은 국민경제에 막대한 비용을 부과 신뢰성이 높은 중앙은행은 경제주체들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쉽게 제압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중앙은행은 필요이상의 긴축정책을 가해야만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인플레를 억제할 것이라고 믿으려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믿음이 없는 중앙은행을 가진 경제는 이른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 과정에서 생산과 고용이 과도하게 침체되는 추가비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신뢰받는 중앙은행은 설령 확장적 통화정책을 동원하더라도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크게 자극하지 않을 것이다. 낮은 인플레 비용으로 성장과 고용침체에 무리 없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뢰받지 못하는 중앙은행은 정책기조를 약간만 완화하더라도 엄청난 인플레 기대심리에 직면하게 된다. 최근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시사발언이후 분출하고 있는 부동산 투기심리와 이에 대한 빗발치는 비난여론은 우리 중앙은행 신뢰의 현 주소를 말한다. 백가쟁명식 통화정책 훈수는 신뢰상실의 원인 아닌 결과 `금리를 빨리 내려라` `안된다`. 나무꼭대기로 쫓겨 올라간 한국은행은 요즘 난무하는 독촉과 비난에 흔들리고 있다.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수차례에 걸쳐 "물가부담 완화로 금리인하 여력이 커졌다"고 한 데 대해 박승 한은 총재가 결국 "우리도 같은 생각"이라고 입장을 바꾸자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은 "빨리 할 필요가 있다"고 독촉했다. 반면, 한은 홈페이지를 시작으로 봇물을 이룬 금리인하 비난 여론은 정치권과 한은 내부로까지 번지고 있다. 여당의 최고 정책 책임자가 대통령에게 "부동산 안정대책 없는 금리인하는 반대"라는 뜻을 밝히는가 하면, 한은 노동조합은 외부(전문가 여론조사)의 힘을 빌어 제동을 걸고 있다. 한은 고위 관계자 말마따나 `입이 달린 사람이라면 모두들 한 마디씩 거드는` 형국이다.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이 적정하다고 도무지들 믿으려 들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한은 노조가 경제전문가들에게 물어봤더니 3분의2가 "통화정책이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신뢰상실은 한국은행이 자초한 것 한국은행이 신뢰를 상실한 것은 전문성이 결여된 조변석개(朝變夕改)식 경제전망과 정책결정, 신중하지 못하고 단정적인 대외 발언, 의심받는 독립의지, 투명하지 못한 정책결정 과정 등이 복합적으로 아우러진 결과다. 지난해말 5.7%의 경제성장을 전망했던 한은은 불과 한 달여만에 5.5%로 전망을 낮춘 뒤 두 달후에는 4.1%로 대폭 물러섰다. 한은이 이를 다시 3.8%로 되낮추는데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지난 3월초 "국민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고 내핍으로 흡수해야 한다"고 호소했던 박승 총재는 지난달 17일까지 "4.1% 이상의 성장도 가능하므로 적자재정 조차 불필요하다"고 해놓고서는, 보름도 채 안돼 돌연 "경제를 보는 시각이 정부와 별 차이 없다"며 금리인하 불가피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박 총재가 정책방향 선회발언 직전 청와대에서 거시정책 관련 회의를 가진 사실은 한은 독립성에 대한 의구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지난해 가을에도 외압 때문에 금리인상이 좌절됐었다고 믿는 한은 안팎의 시선이 고울리 없었다. 박 총재의 정책선회가 비(非)전통적인 방법으로 시장에 전달된 점은 한은의 투명성에 상처를 안겼다. 안정의지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큰 문제 한은의 안정의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문제이다. 부동산시장 과열에 대해 대다수의 전문가들과 시민들은 `초저금리 정책이 낳은 거시경제적 현상`으로 보는 반면, 한은은 `미시적 대책으로 해결 가능한(2002년 연차보고서) 현상`으로 치부해왔다. 물가불안에 대해서도 한은은 `고유가와 농산물 수급불안에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경시할 뿐, 수년째 한 차례도 쉼없이 상승하고 있는 개인서비스요금과 집세 등 확장적 통화정책의 산물은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는 금리를 내리더라도 부동산 시장은 당장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까지 한은 내부에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4월2일 (BOK워치)"경기하강 위험이 더 크다" 참조] 한은 집행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금통위원들의 `확장` 성향을 우려하며 `독립성 강화`를 외쳤지만, 지난해 12월의 금통위 의사록은 반드시 늘 그렇지는 않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 한은 집행부는 2.5%이던 중기 물가안정 목표 상한선을 4%로 대폭 높이고자 했으나, 금통위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3.5%로 확대하는데 그쳤다. 집행부는 "물가목표 달성의 어려움"을 강조한 반면, 금통위원들은 "물가안정 의지 퇴색"을 우려했다. [4월3일 금통위, 물가목표 상향 놓고 집행부와 설전 참조] 물가안정을 목표로 하면서도 투쟁하지는 않으려는 중앙은행을 누가 믿을 것인가. 블라인더 교수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플레이션과의 투쟁 역사`는 중앙은행의 신뢰를 높이는 방안중 `언행일치` `독립성`에 이어 세번째로 중요한 덕목으로 꼽혔다. 신뢰회복, 시간이 많지 않다 5월 통화정책 방향 결정을 눈앞에 둔 한은 내부는 지금 한편으로는 임박한 집행간부 및 국장급 인사 향방에 촉각이 곤두서 있다. 내달 임시국회에서 다뤄질 한국은행법 개정안에도 깊은 관심과 기대감을 품고 있다. 최근의 백가쟁명식 여론에 대해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 것으로 낙관한다. 어느 고위 관계자는 "13일 금통위 이후 조용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물가불안, 부동산 가격 앙등, 가계부채 급증, 신용불량자 양산 등 제반 부작용의 원인 제공자중 하나로 한국은행을 `비판`해 온 여론은 이제 부동산 투기를 부추긴다는 `비난`으로 번지고 있다. 심지어는 `심약한 한은이 결국 금리를 못내리게 될 것`이라는 `조롱`까지 나오고 있다. 신뢰를 잃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그 것을 되찾는 데에는 기나긴 세월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고통과 인내를 마다하기에는 국민이 한은에 부여한 권한과 책임이 너무도 막중하다. 신뢰 없는 중앙은행을 가진 경제에 희망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은 이미 지난 90년대말에 충분히 경험했다. 한국은행이 가진 시간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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