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edaily 정명수특파원] 월트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스너 회장이 주주들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는 모습을 CBS마켓워치는 "Big Cheese at Stake in Philly"라고 표현했다.
우리말로 하면 "큼직한 치즈 덩어리가 필라델피아에서 위기에 처했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치즈 덩어리는 아이스너 회장이다. 올해 디즈니 주주총회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필라델피아에는 `필리 치즈 스테이크(Philly Cheese Steak)`라는 전통음식(?)이 있다. 길다란 햄버거 빵에 얇게 저민 쇠고기 불고기를 깔고, 그 위에 치즈를 듬뿍 얹은 것이다.
CBS마켓워치는 아이스너 회장이 필리 치즈 스테이크의 치즈처럼 흐물흐물 녹아서 주주들에게 먹혀버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이렇게 묘사한 것이다.(의도적으로 Steak와 발음이 같은 Stake라는 단어를 썼다.)
디즈니의 본사는 서부의 캘리포니아다. 디즈니가 무슨 이유로 동부의 필라델피아까지 와서 주주총회를 열었는지 모르겠지만, 필라델피아는 컴캐스트의 본거지다. 컴캐스트는 디즈니에 대한 적대적 M&A를 선언한 미국 최대의 케이블 컴퍼니다.
아이스너는 컴캐스트의 앞마당에서 당당하게 주총을 열고, 주주들의 재신임을 얻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당장 아이스너의 진짜 적은 필라델피아의 컴캐스트라기보다는 캘리포니아의 캘퍼스(CalPERS)다.
캘퍼스(California Public Employees" Retirement System)는 캘리포니아공무원퇴직연금을 뜻한다. 자산 규모가 1611억달러에 달하는 미국 최대의 연기금펀드다.
캘퍼스는 연금펀드로는 처음으로 아이스너를 불신임하겠다고 공언, 아이스너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캘퍼스의 뒤를 이어 뉴저지주, 오하이오주 연금펀드 등이 "더 이상 아이스너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캘퍼스는 지난해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그라소 회장을 쫓아내는데도 일조했다. 엄청난 연봉으로 구설에 오른 그라소는 버티기로 일관했지만, 캘퍼스가 그라소를 밀어내기로 마음먹자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NYSE는 최대 고객 중 하나인 캘퍼스의 요구를 묵살할 수 없었다. 캘퍼스는 그라소가 사임한 이후에도 NYSE 지배구조에 대해 끊임없이 시비를 걸었고, 지금은 스페셜리스트 회사들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미국 증권 뉴스를 보고 있으면 사건사고가 있는 곳에 거의 빠짐없이 캘퍼스가 등장한다. `펜션 자이언트(Pension Giant) 캘퍼스`는 단순한 연기금 펀드가 아니라 미국 금융산업을 리드하는 `맏형`, 때로는 `경찰`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캘퍼스의 위력
캘퍼스의 자산 규모는 필리핀 한 해 총생산의 8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캘퍼스는 1932년 설립돼 주공무원들의 퇴직연금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1962년 공무원의료보호법에 의해 오늘날의 캘퍼스와 같은 형태를 갖췄다.
캘퍼스는 기본적으로 가입자(공무원과 그 가족)들에게 의료 서비스 및 퇴직 급여 등을 지급하는 일을 한다. 현재 가입자는 140만명에 달하고, 각종 서비스 수혜자는 100만명이 넘는다. 퇴직연금 수령자도 40만명이나 된다.
캘퍼스는 연금펀드 운용수익으로 회원들에게 각종 서비스와 퇴직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따라서 기금운용이 캘퍼스의 기본적인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캘퍼스의 자산은 크게 채권, 주식, 부동산 등에 투자된다. 이는 미국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전세계 금융시장과 부동산시장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2003년말 현재 채권 투자 비중이 26%, 주식이 65%, 부동산이 9%다. 주식 투자 비중이 월등히 높기 때문에 미국 주식시장에서 발언권도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그렇다면 캘퍼스의 운용 수익률은 어떨까. 우선 캘퍼스 운용자산은 1985년 327억달러이던 것이 1990년에는 575억달러, 1995년에는 969억달러로 급증한다. IT 버블이 최고조에 달하던 1999년에는 자산 규모가 1719억달러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2003년말 현재 자산은 1611억달러로 지난해 운용 수익률은 23.3%. 펀드의 벤치 마크를 200bp나 초과 달성했다. 일반적으로 덩치가 크면 기동성이 떨어지고, 투자 의사 결정도 느리기 때문에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캘퍼스의 경우는 다르다. 캘퍼스도 아시아 등 이머징 마켓 투자를 게을리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지난해 캘퍼스의 수익률은 1990년 버블기 이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다.
엄청난 자산 규모, 높은 수익성. 이것이 캘퍼스의 전부가 아니다. 캘퍼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캘퍼스 효과
캘퍼스 자산 운용의 효율성을 외부에서 점검하는 월셔컨설팅은 1987년부터 1999년 사이 캘퍼스가 기업 지배 구조 개선을 요구한 기업들의 주가 상승률을 분석했다.
5년 동안 주가 흐름을 추적한 결과, 캘퍼스의 간섭을 받은 기업들은 S&P500 지수를 14% 초과하는 상승률을 보였다. 캘퍼스가 훈수에 나서기 전, 이 기업들의 주가 상승률은 S&P500 지수 상승률의 96% 밖에 따라가지 못했다.
캘퍼스가 주주총회에서 CEO의 교체를 요구하고, 독립 이사회를 강화하라고 시비를 걸었기 때문에 기업들의 체질이 강화됐고, 중장기적으로 주가 상승률도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월셔컨설팅은 이를 `CalPERS Effect`라고 명명했다.
실제로 캘퍼스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기업 경영에 간섭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캘퍼스가 이처럼 기업 지배 구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다.
연기금 펀드의 속성상 중장기 투자가 필수적이고, 캘퍼스처럼 주식 투자 비중이 높을 경우에는 `안정적`인 수익도 무시할 수 없다. 캘퍼스는 80년대 미국 기업들이 극심한 구조조정에 겪으면서, 자신들이 투자했던 기업들이 `기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영자`들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해야했다.
캘퍼스는 스스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초 사이에 "이런 기업들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게임의 룰을 터득했다"고 밝히고 있다. 캘퍼스가 높은 운용 수익률을 자랑하는 것도 기업 지배 구조에 대한 끊임없는 간섭과 견제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캘퍼스는 이 기간 중 세가지를 체득했다. 첫째, 경영자들은 절대적 기준이나, 동종 업계의 다른 기업과 비교해서 월등한 실적을 내기를 원한다.
둘째, 경영자들은 장기적인 전략과 비전을 채택하려고 하지만, 종종 주주들의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셋째, 모든 기업들은 지배 구조의 건전성과 관계없이 실적의 상승, 하강을 경험한다.
캘퍼스가 생각하는 `책임있는 기업 지배(accountable governance)`란 다소 철학적이다. 기업은 지배 구조에 따라서 영원히 수익 사이클을 반복하는 수렁에 빠질 수도 있고, 반대로 환경변화에 따라 신속하게 대응, 기업의 진로를 안전하게 바꿔 나갈 수도 있다는 것.
캘퍼스의 `기업 지배 구조 포럼` 웹사이트에는 다음과 같은 인용문이 게재돼 있다.
"다윈은 경쟁 환경하에서 생물이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단지 `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어떤 생물이 다른 생물보다 아주 작은 부분에서 우월하다면 그 우월성은 시간을 두고 점점 더 증폭될 것이다. `종의 기원`에서 다윈은 작은 밀알만큼의 차이가 개별 종의 생사를 결정할 것이라고 썼다.
나는 독립적이고, 세심한 이사회가 기업의 우열을 가늠하는 밀알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실행력이 있는 이사회만이 끊임 없이 변하는 세상에 가장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생기없는 이사회는 제자리를 맴도는 리더십밖에 발휘할 수 없다.(Darwin learned that in a competitive environment an organism’s chance of survival and reproduction is not simply a matter of chance. If one organism has even a tiny edge over the others, the advantage becomes amplified over time. In ‘The Origin of the Species,’ Darwin noted, `A grain in the balance will determine which individual shall live and which shall die.’ I suggest that an independent, attentive board is the grain in the balance that leads to a corporate advantage. A performing board is most likely to respond effectively to a world where the pace of change is accelerating. An inert board is more likely to produce leadership that circles the wagons.)"-아이라 밀슈타인, 뉴욕타임즈 1997년 4월6일.
캘퍼스같은 거대 연기금이 `진화론`까지 들먹이며 운용철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캘퍼스는 1998년 `기업 지배 원리와 가이드 라인(CORPORATE GOVERNANCE PRINCIPLES AND GUIDELINES)`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사회의 독립, 오너와 경영진의 관계, 독립 이사의 지위 등을 규정하기에 이른다.
캘퍼스는 1997년부터 기업 지배 구조와 관련 `요주의 기업`을 선정, 해당 기업의 이사회를 개혁하도록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캘퍼스의 리스트에 올랐던 기업으로는 애플컴퓨터, 노벨, 리복, AMD, 타이슨푸드, JC패니, 서킷시티, 루슨트테크놀로지, 게이트웨이컴퓨터 등이 있다. 지난해에는 JDS유니페이즈, 제록스 등이 명단에 올랐다.
캘퍼스는 기업 지배 구조뿐 아니라 휴렛팩커드와 캠팩의 합병에 반대하는 등 기업의 주요 의사 결정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거대 연기금 펀드로서의 무게 때문에 캘퍼스의 발언은 실제 보유 주식 규모 이상으로 다른 주주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캘퍼스는 가만히 앉아서 배당이나 받고, 주가 상승만 향유하는 수동적인 주주가 아니다.
◇세계를 개조한다
캘퍼스의 자산 운용은 미국내에 한정돼 있지 않다. 캘퍼스의 `진화론적 투자철학`은 세계를 상대로한 투자 원칙이기도 하다. 이는 미국적 가치관을 세계에 전파하는 통로 역할도 하고 있다.
캘퍼스는 매년 월셔컨설팅에 의뢰, 자신들이 투자할 수 있는 이머징 마켓을 선정 발표한다. 일정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국가에 대해서는 아예 투자를 하지 않는다. 캘퍼스는 이머징 마켓 국가들을 대상으로 `국가 요소`와 `시장 요소`를 분석, 기준선인 2점을 넘겨야만 투자적격 지위를 부여한다.
지난해와 올해 필리핀이 캘퍼스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필리핀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캘퍼스를 방문, 자국의 정치, 경제 상황이 개선되고 있음을 설명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국가 요소나 시장 요소의 세부항목을 보면 캘퍼스가, 미국이, 이머징 마켓을 어떻게 재단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볼 수 있어서 사실 씁쓸하다.
국가 요소는 정치적 안정성, 투명성, 노동 생산성으로 크게 구분돼 있다. 정치적 안정성은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와 같은 시민권의 보장 정도, 사법재판의 독립성과 합법성, 정치적 위험성 등으로 구성돼 있다.
투명성 항목에는 재정적 투명성, 통화 및 재정정책의 투명성, 주식 상장 요건, 회계 투명성과 같은 경제적 내용 외에 공정한 선거, 언론의 자유와 같은 정치적인 내용까지도 포함돼 있다.
노동 생산성에는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한 노동 규칙의 준수여부, 정부의 노동 관계 법령의 집행 의지 등이 들어있다.
시장 요소는 유동성과 변동성, 시장 규제, 투자자 보호, 시장 개방 정도, 결제 비용 등 주식 및 채권 투자에 필요한 일반적인 사항들이다.
한국은 캘퍼스의 기준으로 최상위권 이머징 마켓에 속한다. 월셔컨설팅은 2005년에는 한국과 대만이 FTSE 지수 등 주요 벤치마크에서 선진국 지수에 편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이머징 마켓을 추가해야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