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숙현 기자]
"우리 국내총생산에는 대기오염, 담배 광고, 시체가 즐비한 고속도로를 치우는 구급차도 포함됩니다. 우리 문을 잠그는 특수 자물쇠와 이것을 부수는 사람들을 가둘 교도소도 포함됩니다... 핵탄두와 도시 폭동 제압용 무장 경찰차량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국민총생산은 교육의 질, 시의 아름다움, 공개토론에 나타나는 지성, 우리의 해학과 용기, 국가에 대한 헌신과 열정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 (로버트 케네디)
196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로버트 케네디가 켄자스 대학에서 한 연설의 일부다. 케네디가 제기한 이 문제는 4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그다지 삶이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아이 낳기가 무서워 출산율은 세계 최저수준이고, 삶에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늘어나 자살율은 OECD국가중 최고다.
◇ 수치는 나아지고 있지만…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미국 남가주대학교 리차드 이스터린 교수의 보고서는 흥미롭다. 22년간 37개국의 경제 성장률과 국민들의 삶의 만족도와의 관계를 조사한 것인데 선진국과 후진국, 과거 공산국가 등이 모두 망라돼 있다.
조사결과 경제가 크게 성장하더라도 국민들은 과거보다 행복하다고 느끼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조사기간동안 1인당 평균 국민 소득이 두 배가량 뛰어오른 한국, 중국, 칠레 국민들은 `오히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졌다`고 답했다.
상대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조사결과
(왼쪽 그래프 참조)도 있다.
작년 말 헤럴드공공정책연구원의 여론조사를 보면 자신을 중산층이라 규정한 이들은 현재 삶에 가장 만족(행복한 편 88.1%)해 했다. 상류층(행복한 편 63.9%)은 오히려 서민층(68.8%)과 비슷한 인식을 보였다.
지난해 한국의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2만불을 넘어 최고치를 기록한 후 금융위기로 주춤했다가 다시 2만 달러를 넘어선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대해 `끼니 걱정`이 사라지고 `어떤 식사를 할지`를 고민하는 단계라고 표현한다. 양적인 성장에서 이제는 질적인 향상, 이른바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는 의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홍석표 박사는 '복지 GDP'라는 개념으로 삶의 질을 따져봤다. 환경오염으로 아토피 환자가 늘고 범죄 증가로 경비업체가 증가하면 매출증가로 GDP자체는 늘지만 이것을 `행복`하다고 볼 수 없다. 이를 반영한 결과가 바로 복지GDP다.
연구결과 1996년 1인당 복지GDP는 8101달러로, 1인당 GDP(1만2249달러)의 66.1% 수준이었다. 10년후인 2007년에는 1인당 복지GDP가 1인당 GDP(2만15달러)의 57.8%에 낮아졌다. 실제로 1996~2007년 기간 1인당 GDP의 성장률이 연평균 4.5%인데 비해 1인당 복지 GDP의 연평균 성장률은 3.2%에 그쳤다.
◇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작년말 한국사회는 `통큰치킨` 논란으로 뜨거웠다. 국내 최대 소매업체인 롯데마트가 5000원짜리 치킨을 내놓았다. 치킨전문점의 3분의 1 가격에 불과했다. 파격적인 가격인 통큰치킨은 그러나 시판한지 불과 7일만에 매장에서 사라져야 했다. 소비자들의 선택기준은 가격이 전부가 아니었다. 당시 `날아가는 물가`를 감안하면 장바구니 물가에도 적잖은 도움이 됐을텐데도 말이다.
| ▲ `통큰치킨`은 비록 7일만에 판매가 중단됐지만 한국인의 소비기준이 가격에서 가치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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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큰치킨 논란을 보며 사람들은 대기업이 언제든지 영세상인들의 밥그릇을 빼앗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아동노동 착취로 비판받아온 미국의 대형 유통회사 월마트나 나이키에 대한 시민사회의 불매운동과 같은 맥락이다. 이를 두고 양극화 시대에 버려진 `나머지 80`의 두려움이자 분노였다는 평가도 있었다.
최근 소비자들은 `공정무역`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공정무역이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불공정한 무역으로 발생하는 구조적인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도국의 생산자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행해지는 무역이다.
예를 들어, 일부 커피전문업체들은 `공정무역`을 실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기업은 좋은 이미지와 함께 돈은 벌고, 소비자들은 `착한커피`를 소비함으로서 간접 기여한다고 믿게 된다. 생산자나 소비자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간다. 아동노동과 불법적인 약물시험, 동물학대와 환경파괴 등을 통해 `이익만 취하면서 되는 기업`은 발붙이기 힘들어 진다.
이러한 추세는 마케팅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 코틀러의 `마켓 3.0`이라는 개념과 일치한다. 코틀러 박사는 `마켓 1.0`이 제품 위주의 시대, `마켓 2.0`이 고객 감동의 시대였다면, `마켓 3.0`은 고객을 비롯한 사회가 기업 및 브랜드의 주인이 되는 시대라고 정의한다.
나아가 `마켓 3.0`시대에는 기업이 사회의 변혁을 주도하거나 참여하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경영`이 불가능하다고 예언한다. 지속가능한 경영이란 단순히 살아남는 기업이라는 의미를 넘어 사회와 환경을 생각하는, 결국 `긍정적인 성장`에 기여하는 경영이라고 말한다.
케네디는 국내총생산의 개념이 실상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삶의 질을 생각하기 시작한 한국. 이미 40년 전에 한 정치인이 던진 화두는 이제 우리 몫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