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에서 한반도의 중심으로, 무릉도원의 고을 양구

  • 등록 2009-03-10 오후 4:06:00

    수정 2009-03-10 오후 4:06:00

[경향닷컴 제공] 산과 계곡의 고을 양구는 최근까지 오지의 대명사로 일컬어졌지만 멀리 구석기 시대부터 신선을 꿈꾸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어 둥지를 틀었던 무릉도원의 세계라고 할 만하다. 인공위성을 통한 과학적 측정으로 국토정중앙이라는 지위를 얻었다.

“멧부리와 봉우리가 반이나 둘러쌌네(岡巒半向環)~.” 고려 명종대(재위 1170~1197년)의 학자 노봉(老峯) 김극기(金克己)는 입만 열면 시(詩)가 줄줄 나왔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산과 계곡의 고장 양구(楊口)를 이렇게 읊었단다. 선조 25년(1592년)에 부임한 감사가 금강산에 이르는 첫 고을의 아름드리 수양수림(垂楊樹林)을 보고 지었다는 그 이름 양구(楊口). 김극기는 나아가 “아름다운 수풀이 빽빽하고~ 대숲에 비친 해가 그윽한, 문득 신선이 사는 곳(洞府)인가 싶다”는 찬사를 보냈다.

현현한 12만 년 전의 세계

하지만 전설의 은사(隱士) 허유(許由)라면 모를까, 이렇듯 먹고 살기 힘든 첩첩산중에 누가 둥지를 틀고 살 것인가. 그도 그럴 것이 태백산맥의 지맥이 금강산 남쪽 기슭에서 이어져 남북으로 종단하고, 동단엔 가칠봉(1242m)·대우산(1179m)·도솔산(1148m), 중앙에는 비봉산맥이 있으며, 서단엔 백석산(1142m)·사명산(1198m)을 연결하는 어은산맥이 버티고 있으니….

▲ 평화의 댐 공사로 노출된 상무룡리 구석기 유적. 지금은 수장됐다.


그런가. 그러면 양구는 신선이 아닌 속인(俗人)은 살 수 없었던 땅이었던가. 아니다. 험준한 산과 계곡이 하늘을 가린 이 땅에는 물경 12만 년 전부터 고인류-현생인류가 차례로 터전을 잡고 살던 곳이니. 지난 198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평화의 댐 건설공사를 위해 파로호의 물을 빼기 시작했다. 양구 상무룡리 일대는 1943년 화천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됐던 지역. 물을 빼자 그곳에서는 12만 년 전~1만8000년 전 중기 및 후기구석기 유적이 노출됐다.

그뿐이 아니었다. 화채그릇을 닮았다고 해서 한국전쟁 당시 ‘펀치볼’로 일컬어졌던 해안(亥安) 분지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들을 쏟아냈다. 굽이굽이 상무룡리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천혜의 마을이 하늘의 기운을 내뿜는 양지 바른 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또한 해안분지는 꼭 피안(彼岸)의 세계, 혹은 무릉도원으로 일컬어질 만하다. 무릉도원의 주민들이 그랬다지.

도연명을 꿈꾸려면

“우린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이곳에 와서 한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한데 밖은 도대체 어떤 세상입니까?”(도연명의 ‘도화원기’) 최전방 을지전망대에 올라 해안분지를 바라보라. 가칠봉·대우산·도솔산·대암산·달산령(807.4m)·먼멧재(730m) 등 고봉준령이 둘러싼 기묘한 분지(남북 11.95㎞, 동서 6.6㎞)를….

▲ 을지전망대에서 바라본 양구 펀치볼(해안분지). (양구군청 제공)


“차별침식으로 생겨난 분지로 해석됩니다. 중심부는 화강암, 주변부는 변성퇴적암으로 되어 있는데, 중심부 화강암이 빗물과 바람으로 빠르게 침식되어 주변의 퇴적암 지대보다 낮아졌다는 겁니다.”(이우형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

교통수단이 거의 없었던 시절 강(江)은 곧 고속도로였다.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혹은 동해안을 따라 내려온 선사시대 사람들은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이곳 양구를, 그리고 더러는 해안분지를 찾아 무릉도원의 세계, 피안의 세계를 만끽했을 터이다.

지금 이 순간 도연명의 기분을 만끽하려면 2008년 12월 개통된 돌산령 터널(453번 도로)을 통과해보라. 특히나 비오는 날…. 2995m에 이르는 터널은 지독한 안개로 한 치 앞도 보기 힘들다. 그 까마득한 길을 반쯤 지나면 반달 모양의 터널 끝에 새하얀 별천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윽고 터널을 벗어나면 운무 사이로 넓디넓은 무릉도원의 세계, 피안의 세계가 꿈처럼 펼쳐진다. 바로 선사인들이 둥지를 틀었던 바로 그곳, 해안분지이다.

신선의 땅에서 갈등을 낳은 오지로

신선을 꿈꾸는 이들의 터전이었던 양구는 이후 속인들에게는 살기 어려운 땅, 심지어는 비극의 땅으로 변했다. 해방 이후 38도선으로 남북이 갈리자 양구는 이른바 적 치하로 바뀐다. 그리곤 벌어진 비극의 한국전쟁. 신선의 땅은 도솔산 전투·피의 능선 및 단장(斷腸)의 능선 전투·백석산 전투 등 이름만 들어도 살벌한 전쟁터가 된다. 냉전의 상징으로는 제4땅굴이, 분단의 상징으로는 끊어진 31번 국도(부산 기장~함남 안변)가 있다. 필자는 31번 국도가 끊어진 지점까지 진흙탕 길을 하염없이 달렸다. 예전 사람들은 이 길로 금강산을 오갔다는데….

▲ 2002년 위성탐사 등으로 찾아낸 국토 정중앙점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하는 그 유명한 말이 있다. 하지만 천하의 인제·원통 병사들도 양구로 배치된 병사들을 위안삼아 군대생활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흔히 만날 수 있는 헌헌장부(軒軒丈夫) 장병들의 군기 든 얼굴들이 믿음직스럽기도 하지만, 또 어찌하여 이 최전방까지 배치받았을까 하는 생각에 애처롭기만 하다. 인제·서화를 통해, 그리고 춘천을 지나 그 유명한 굽이 길을 통해 들어서야 하는 양구 최전방은 그만큼 멀고 험했던 것이다.

양구가 더욱 살기 어려운 오지(奧地)로 된 것은 화천댐·소양강댐 때문이다. 1943년 화천댐 건설로 면 하나(북면)가 폐면되었고, 1973년 준공된 소양강 댐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평야지대가 대부분 수몰되었으니 말이다. 특히 춘천~양구를 잇는 46번 국도는 소양강댐 건설로 인한 침수로 구절양장(九折羊腸)길을 돌아가야 할 만큼 어려웠다.

“심하게 말하면 댐 건설로 양구군은 망했다고 보면 됩니다. 가뜩이나 오가기 힘든 길이었는데 인구가 급격히 줄었고…. 서울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 거리’는 더욱 멀어졌습니다.”(전창범 군수)

국토의 정중앙이 되다

하지만 이제 양구는 군사 도시이자 오지의 이미지를 벗어날 참이다. 우선 2002년 인공위성을 통한 정밀 측정을 통해 양구군 남면 도촌리 산48번지가 대한민국의 정중앙임을 밝혀냈단다. 군 각개전투장이었던 정중앙점은 단숨에 양구의 상징이 되었다. 어쨌든 양구는 ‘한반도의 오지’에서 이제는 ‘한반도의 정중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굽이굽이 악명 높은 46번 국도도 이제 3곳의 터널(수인터널, 웅진 1·2터널)이 뚫리면서 한숨 돌렸다. 이제 춘천~화천간을 잇는 배후령 터널만 뚫리면 극심한 차멀미에 시달리면서 군대 간 아들을 면회했던 기억은 또한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하남~춘천을 잇는 동서고속도로가 뚫리면 서울~양구 거리는 1시간 30분 걸릴 것입니다.”(전창범 군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양구의 특산물은 방산 고령토로 만든 자기(磁器)와 잣, 오미자, 인삼 등이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4~5개월만 키우는 시래기와, 맛과 향기가 최고인 곰취는 물론이고, 극심한 일교차 덕분인지 사과 또한 당도가 최고란다.

▲ 열목어 최대서식지인 두타연

“온난화 때문인가요. 대구·청도 등에서 자라던 사과가 심지어는 최전방지역인 해안분지에서 고랭지 채소의 대용품으로 각광받고 있어요.”(방영선 해안면장) 무슨 말인가 하면 최근 소양호로 밀려드는 토사의 원흉이 해안분지에서 키우는 고랭지 채소 탓이라는 분석에 따라 대체작물로 사과나무를 키울 요량인데, 이는 날씨가 따뜻해졌기에 마련할 수 있었던 대안이라는 것이다.

양구를 방문하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군립 박수근 미술관이다. 박수근 화백의 고향인 정림리 생가터에 마련된 미술관에는 작가의 채취가 묻은 유품과 유화, 수채화, 판화, 드로잉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짧아진 거리, 남은 과제

어쨌든 ‘오지’에서 ‘중심’으로 탈바꿈한다는 양구의 야심은 물론 긍정적이다. 하지만 필자와, 동행한 이우형씨의 얼굴에 걱정거리가 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양구엔 열목어 최대서식지인 두타연과, 대암산(1340m) 기슭에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고층습원인 용늪(천연기념물 246호) 등이 있다. 교통이 편리해지면 사람들의 손을 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천혜의 자연유산들은 한 순간에 끝장이 될 수 있는 곳들이다.

2009년 2월 두타연을 찾았던 날. 민통선 출입을 통제하던 군 초소가 4㎞ 북상했다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기존의 군 초소는 용도폐기 되었고 한참을 더 가서야 통제선이 보였다. 아직은 민통선 이북이라지만, 사람들과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이고, 훼손의 염려가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곳에 두타연 트래킹코스까지 설치되었다.

“걱정은 걱정이에요. 오지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사람이 살 수 있는 고을도 만들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천혜의 자연 및 문화유산들의 가치를 보존시켜야 하고….”(이우형씨)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고을이어야 바로 양구군의 슬로건처럼 “양구에 오면 10년이 젊어지는” 비결이 될 것이다.

대암산 용늪   우리나라 유일의 고층습원 해발 1280m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는 군부대의 통제 아래 놓여 있다. 연중 5개월 이상 영하권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다. 지표가 해빙 및 결빙을 반복하면서 습지식물의 유체가 퇴적됐다. < 양구군청 제공 >
31번 국도   분단으로 끊어졌다 동면 비아리 인근에 있다. 필자는 두타연 쪽에서 눈이 녹아 진흙탕이 된 군 도로를 따라 이곳을 찾았다. 금강산으로 통하는 길이다. 
돌산령 터널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는 길 끝자락에 꿈처럼 펼쳐진 해안분지의 아련한 모습이 보인다. 2008년 12월 돌산령 터널이 임시 개통되자, 양구군에 속한 면(해안면)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출입이 쉬운 인제군과 가까웠던 해안면 주민들이 금세 양구권역으로 편입되었다. 
박수근 미술관   이름없고 가난한 서민을 그린 화가 박수근 화백은 1914년 양구 정림리에서 태어났다. 양구군은 작가의 예술관과 인생관을 기리기 위해 미술관을 건립했다
제4땅굴   대표적인 안보관광지 제4땅굴은 1990년 3월 3일 확인됐다.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1200m 떨어진 곳이며, 규모는 높이와 폭이 1.7m이며, 길이 2052m이다. 인근에 해안분지는 물론 금강산까지 조망할 수 있는 을지전망대가 있다.

가는 길/
서울~춘천~양구를 잇는 46번 국도를 타면 양구까지 2시간 30분이 걸린다. 거리는 151㎞이다. 구절양장이어서 매우 험했지만 요즘 수인·웅진 1·2터널 등이 생겨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서울~양평을 거쳐 44번 국도를 통해 홍천~신남~양구로 이어지는 길도 있다. 거리는 160㎞이며 2시간 40분정도 걸린다. 버스는 상봉터미널(3시간30분)과 동서울터미널(2시간40분~3시간)에서 탈 수 있다.
 
연락처/
양구군관광안내소 033-480-2675
통일관(제4땅굴·을지전망대) 033-480-2674
박수근미술관 033-480-2655
선사박물관 033-480-2677
국토정중앙천문대 033-480-2586
양구시외버스터미널 033-481-3456
농업기술센터(마케팅사업) 033-480-2280
명품관 033-480-2575

맛집/
이가네 오골계/ 읍내에 있다. 일반적인 백숙요리가 아니라 포를 떠서 숯불 석쇠에 구워먹는다. 특이하면서 느끼하지 않고 개운하다는 평을 듣는단다. 033-482-1066
광치 막국수/ 남면 가오작리에 있다. 메밀로 만든 막국수와 편육이 남다르다는 평을 듣는다. 033-481-4095
양구재래식 손두부/ 직접 키운 콩으로 만든 재래식 두부 요리가 유명하며, 두부전골과 두부구이 등이 호평을 받는다. 033-482-4475
풀향기/ 계절별 나물로 만든 산채정식으로 유명하다. 특히 양구의 특산인 곰취의 맛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033-481-6669
청솔골/ 방산천에서 잡히는 잡어들로 요리하는 민물매운탕이 일품이라는 평이다. 방산천 바로 곁에 있어 풍취 또한 좋다. 033-481-1094

숙박/
KCP호텔/ 양구읍내를 흐르는 서천 변에 자리잡고 있는 1급 호텔이다. 대·소연회장, 웨딩홀, 사우나, 노래방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033-482-7700
센츄럴모텔/ 터미널 바로 옆에 있다. 깔끔한 모텔이다. 033-481-2121
포시즌 펜션/ 읍내에서 2분 거리다. 큰 규모의 펜션이다. 위락시설과 산책로와 연못 팔각정 등이 있다. 033-481-6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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