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진의 Tour & Culture)이집트학을 시작하자

  • 등록 2008-09-08 오후 3:30:52

    수정 2008-09-12 오전 9:30:20

[이데일리 정장진 칼럼니스트]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렵기는 하지만 갈수록 "나만의 여행"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고급 여행 정보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특히 이집트나 남미 관련 정보를 요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유럽 쪽도 박물관이나 미술관, 패션, 산업 디자인과 관련된 곳의 정보를 원하는 이들이 많이 늘고 있다. 가끔이기는 하지만 한적한 수도원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기도 한다. 아마도 서양식 '템플 스테이'를 찾는 이들인 것 같다.

인터넷 정보의 신뢰성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실용적이면서도 깊이가 있는 정보를 구축하는 일이 문화지식산업계에 대두된 시급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행산업의 꽃인 가이드북만 봐도 아직 외국 책들을 무분별하게 번역하는 수준에 머물러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외국 가이드북들 중에는 웬만한 문화사 개론보다 나은 책들이 많지만, 문제는 크든 작든 한 산업계의 근간이 되는 이른바 데이터 베이스 구축을 언제까지 외국에 의존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시작할 때가 왔음에도 정부나 산업계 차원에서 이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흔히 관광 인프라라는 말을 많이들 하지만 관광 인프라 중의 인프라는 가이드북이며 이 작업은 축적된 데이터 베이스의 질과 양에서 승부가 갈린다. 프랑스의 미슐랭 가이드북이 차지하고 있는 세계적인 위상은 프랑스의 문화지식산업의 정교하면서도 풍부한 데이터 베이스에 기반을 둔 자연스러운 결과다.

요즈음 들어 이집트에 관한 문의가 부쩍 많아지기도 했지만, 여행산업이 먹고 노는 산업이 아니라 지식산업이며 또한 지식산업이 한 나라의 지식과 문화 수준과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집트여서 잠시 이집트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집트에 가보면……

"이집트학을 시작하자"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되물을 것이다. "왜? 그거 돈 되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집트학, 돈 된다. 물론 당장은 아니다.

최근 외신을 타고 들어온 뉴스를 보면, 이집트 남부의 고대 도시인 룩소르(테베) 경찰서 터에서 스핑크스 4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암으로 된 이 작은 꼬마 스핑크스들은 이집트 제30왕조(BC 380∼363년) 시대를 열었던 파라오 네크트네베프 당시의 것들로 추정된다. 한국의 문화재청에 해당하는 이집트 고대유물 최고위원회의 자히 하와스는 "고고학팀이 룩소르 신전과 카르낙 신전 사이를 연결하는 고대 도로의 유적지 일대에서 발굴작업을 하던 중 경찰서 터 밑에서 스핑크스들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 발표를 끝내자 마자, 자히 하와스는 비행기에 올랐고 행선지는 한국, 서울이었다. '이집트의 인디아나 존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자히 하와스는 6개월 전부터 한국 국제 협력단(KOICA)과 함께 유물을 관리, 보존하는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는 사업을 해오고 있다.

▲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쓰레기통 옆에서 소홀히 관리되고 있는 이집트 유물

도심만 벗어나면 오벨리스크가 나뒹굴고, 코가 없어진 거대한 두상이 가로로 쓰러져 있는 이집트에서 사실 작은 스핑크스 몇 개 출토된 것은 뉴스거리도 아니다.

말을 타고 가다 말이 넘어져서 발 밑을 파보니 미라가 나오고, 농지 개량사업을 하다가 석관이 출토되는 나라가 이집트이다.

발에 치이는 것이 유물인 나라가 이집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인지 이집트인들은 왜 굳이 국립 고고학 박물관 같은 것을 지어서 유물들을 따로 보관하고 전시하는지 그 이유를 잘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카이로의 국립 이집트 박물관에 가면 조금 심하게 말해 비참할 정도로 유물 보존이 허술해서 외국인 입장에서도 안쓰러울 정도다.

물론 엄청난 경제난에 시달리는 이집트의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플라스틱 쓰레기통 옆에 유물이 있고, 두상 위에 앉아서 쉬는 경비원하며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유물들이 소홀하게 관리되고 있는 현장을 보면 충격을 금할 수가 없다.

전 세계 유명 박물관에 꼭 있는 이집트관

▲ 로마 바티칸 박물관의 이집트관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카이로의 국립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유물들은 전 세계 유명 박물관에 있는 고대 이집트 유물들보다 양이나 질에 있어 결코 뛰어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루브르와 대영 박물관은 물론이고, 빈 예술사, 베를린, 로마 바티칸, 밀라노, 뉴욕, 상트 페테르부르크 등 어딜 가도 이집트관은 마치 박물관의 필수요소인 양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자리에.
▲ 영국이 돌려주지 않고 있는 로제타 스톤

자히 하와스가 서울에 온 것도 누구보다 이집트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그가 유물을 관리, 보존하는 전산시스템 구축을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자히 하와스는 고대유물 최고위원회 위원장이 된 이후 지금까지 약 5,000 점의 유물을 독일, 스위스, 미국 등으로부터 돌려받았다고 한다.

상형문자 해독의 비밀을 푼 열쇠가 된 영국 대영박물관의 '로제타 스톤'과 독일 베를린에 있는 네페르티티 흉상도 그가 꾸준히 환수를 요구하고 있는 유물이다.

하지만 영국이 '로제타 스톤'을 돌려줄 리 없다. 그 유명한 '엘긴 마블'도 마찬가지다.

같은 EU 국가인 그리스가 가수이자 문화성 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나나 무스꾸리를 앞세워 그토록 돌려달라고 해도 눈 하나 꿈쩍 않는 영국이니 말이다.

남의 나라 유물을 가져다 전시를 하는 서구 열강들이 반성도 하고 유물을 반환해야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유물을 빼앗긴 나라에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많아 사라졌지만 도굴범들이 수천 수만 점의 유물들을 파내서 팔아 치운 것이다.

자히 하와스에 따르면, 그가 위원장이 된 후에 80여 점의 유물을 밀반출한 미국인을 적발하기도 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유물이 도굴되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이집트의 경우 너무나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황금 잔이나 가면이 나오면 녹여서 금반지를 만들어 끼기도 했고, 웬만한 돌덩어리는 집을 짓는데 갖다 쓰기도 했다. 미라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면 불치병이 낫는다는 속설을 퍼뜨려 장사를 한 야바위꾼을 비롯해 수많은 이집트와 백인 도적들이 제집 드나들듯 유물을 파내서 팔아 먹었다. 미라의 저주라는 말이 돌아도 이 도굴과 유물 훼손은 막을 길이 없었다.

▲ 이집트 유물발굴 현장

이집트의 이러한 참담한 문화재 발굴과 보존 실태를 보다 못해 박물관을 세우고 체계적인 유물 발굴을 최초로 이집트에 도입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인인 오귀스트 마리에트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마리에트는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베르디의 < 아이다 > 각본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이집트 오리는 위험한 동물입니다. 한 번 그 부리에 물리면 열병에 걸려요. 그러면 평생을 이집트 연구에 바칠 수 밖에 없습니다……" 1881년 숨을 거두기 전에 쓴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1821년에 태어난 마리에트는 어릴 때 이집트 붐을 타고 사촌이 구입한 이집트 오리 그림으로 된 상형문자를 보고 그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이집트로 건너가 평생 이집트에 살다 숨을 거둔다. 지금도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가면 그의 묘가 안에 있다. 건물도 프랑스인이 지은 신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다. 마리에트가 없었다면 지금의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굴꾼들과 육박전을 벌이기도 했고 당시 이집트인 총독이었던 케디부가 발굴 작업을 방해하며 유물 중에서 자신의 부인에게 줄 보석을 달라고 협박을 해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집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지만, 고대 이집트는 오늘날의 이집트와는 전혀 다른 문명을 갖고 있는 별도의 세계였다. 길고 긴 역사를 몇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마케도니아와 로마의 점령, 기독교 전파, 이슬람 침공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간 고대 이집트는, 모래에 덮여있다 발굴되기 시작한 기자의 스핑크스처럼 땅 속에 숨어있던 전혀 다른 나라였다. 
▲ 이집트 기자에 있는 케옵스 피라미드

누가 이 땅 속의 전혀 다른 문명을 발견했을까? 나폴레옹이라는 답을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반은 맞는 답이고 반은 틀린 답이다. 반은 맞는 답인 이유는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오를 때 대동하고 간 학자와 화가들 때문이다. 나폴레옹 원정 때 군인들과 함께 이집트로 간 화가들은 그곳의 풍물과 고대 유적은 물론이고 동식물과 지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꼼꼼하게 소묘해 귀국한 후 책으로 펴냈다. 마리에트가 어릴 때 본 오리 그림도 이때 나온 도록에 실린 작품의 일부였다. 학자와 데생 화가들의 이국에 대한 관심과 꼼꼼한 작업은 18세기 계몽주의 산물인 '박물학'의 산물이다. 나폴레옹은 루소를 열광적으로 숭배했으며 뷔퐁을 비롯한 프랑스 자연학자들의 작업을 잘 알고 있었던 계몽주의자였다.
▲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당시 화가들이 그린 그림

▲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을 그린 그림

이렇게 해서 유물들이 프랑스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샹폴리옹이라는 금석학자이자 언어학자가 등장해 로제타 스톤의 비문을 해석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지하 세계에서 꺼냈다는 답이 반은 틀린 이유는, 이집트 문명을 선사에서 역사로 옮겨놓은 업적의 반은 바로 이 샹폴리옹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어와 이집트 상형문자 그리고 민간인들이 쓰는 민용문자 등 세 가지 문자로 기록된 비문을 비교 대조하는 과정에서 상형문자가 음운을 적는데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샹폴리옹은 마침내 오벨리스크 등 다른 비문을 대조하면서 전체 문자 체계를 밝혀내기에 이른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 스핑크스, 오벨리스크, 헬리오폴리스 등은 모두 그리스 학자들이 붙인 그리스식 이름들이며 이를 우리는 다시 영어식 표기로 바꿔 부르고 있다.

타원형의 원 속에 들어간 상형문자는 파라오에 관련된 내용이며 웅크리고 있는 여신 상은 여성 명사에 붙는 한정사였고, 눈 그림은 ir이나 er의 음가를 지닌 음운 표시였다. 이렇게 해서 나폴레옹과 샹폴리옹 덕택에 서양에서 '이집톨로지'로 불리는 이집트학이 탄생한 것이다. 이집트학은 요즈음 유행하는 지역학의 선구자로서 가장 오래 된 지역학인 셈이다. 그 다음이 시놀로지sinology, 즉 중국학이다.

이집트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고대 이집트가 오늘날의 이집트와 별 상관 없듯이, 이집트 문명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집트 문명에는 인간과 사회 의 모든 비밀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집트 문명은 인류가 경험한 완벽함의 흔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일 입방 미터짜리의 돌 수백만 개를 쌓아 올리려면 정교한 엔지니어링이 필요할 것이고 자연히 수학이 발달하지 않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또 수만 명의 인부들을 일사 분란하게 동원하고 기술자들을 등급에 맞추어 교육하려면 크고 작은 행정 시스템이 작동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피라미드가 완성되었을 때 마제된 반들반들한 표면에 햇빛이 비치면, 그 광휘는 주변 수십 킬로미터를 환하게 비추었을 것이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믿음과 정교한 수학적 사고가 어울려 만들어 낸 문명이 이집트 문명인 것이다. 어찌 언어가 없었겠는가! 상형문자를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로만 본 단견으로 인해 해독을 못했을 뿐, 정교한 언어 체계를 지닌 완벽한 문명이 기원전 3000년도 넘는 시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집트 문명은 이집트인들의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것이다. 신 아스완댐 건설 당시 아부심벨 유적지를 이전하기 위해 국제적인 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바로 이 점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상업주의에 물든 올림픽 보다 국제적 운동에 힘입어 진행된 아부심벨 이전이 훨씬 의미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 왕의계곡세티1세무덤벽화
고대 이집트 미술품들을 보면, 그 완벽한 조형성 속에 녹아 있는 미학과 종교 감정의 완벽한 일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즉 사회 전체가 고도의 통치력과 종교감정에 의해 빈틈없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집트학은 이집트 연구가 아니라 인류가 경험한 이 전대미문의 완벽함에 대한 연구인 것이다. 즉 그것은 인간 일반에 대한 연구이고 따라서 우리도 참여해야 하는 연구인 것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는 일찍 이집트학이 개설되었으며 이집트 학자인 요시무라 사쿠지의 책은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 있을 정도이다. 전문가가 없으니 이 쇼맨십 강한 일본학자의 글이 정확한 것인지 어떤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일본인들은 또 직접 이집트에 가서 유적지를 찾아내고 발굴 작업도 벌였다. 일본이 하니까 우리도 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집트학은 인문학의 한 분야인 것이다. 전 세계 유명 박물관에 이집트관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이 절대로 로제타 스톤을 돌려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집트학은 돈이 되는 게 아니네……" 이렇게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들려줄 말이 있다. 나폴레옹도 "이집트학이 돈이 되는 게 아니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수백 명의 학자와 데생 화가들을 자신이 탄 배에 함께 태우고 갔다. 그 결과 우리는 프랑스의 이류 이집트 학자들이 쓴 소설도 로열티를 내고 번역해 읽고 있다. 일본의 이집트 학자가 쓴 책까지 학문성 여부도 묻지 못한 채 로열티를 내고 사서 읽고 있다. 이집트학은 이집트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연구이다. 사회, 언어, 정치, 역사, 신학, 미술, 건축에 대한 연구인 것이다. 이 중요한 연구를 어떻게 남의 손에 맡기고 돈이 되네, 안 되네 하고 있을 것인가! 로마도 일본인 여자가 쓴 책을 통해서야 겨우 읽고 있지 않은가.

이집트학을 시작해야 할 때

▲ 파리 콩코드광장의 오벨리스크
파리에 가면 콩코드 광장 한 가운데에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있다. 런던 템스 강변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알려진 오벨리스크가 서있다.
▲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
로마에는 성 베드로 광장과 나보나 광장은 물론이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반 고흐는 파리의 오벨리스크를 본 기억을 떠올리며, 아를 인근의 밀밭과 사이프러스 나무를 그린 다음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오벨리스크를 닮았다"고.

서울 광장에 오벨리스크 하나쯤 갖다 놓으면 어떨까. 영구 임대방식도 있고 하니 터무니없는 생각만도 아닐 것이다. 마침 이집트 고대유물 최고위원회 위원장인 자히 하와스도 서울에 왔다고 하니 이야기를 진척시켜볼 수도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자히 하와스는 분명히 "한국에 이집트학과가 있나요? 이집트 전공 학자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이집트학을 다룬 논문이라도 있으면 좀 보여주실래요" 라고 반문을 할 것이고, 이 질문에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이집트학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멀리 내다보고 고구려학이라는 학문도 만들었으면 한다. 기자, 룩소르, 아부심벨을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미지는 가난한 카이로 길거리를 질주하는 한국산 중고 승용차들이었으며, 입 속에서 맴돌았던 단어는 피라미드도 아니고 스핑크스도 아닌 이집톨로지, 즉 이집트학이었다.

여행·문화·예술 포탈 레 바캉스(www.lesvacances.co.kr) 대표 정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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