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원 환율, 세자릿수 진입...
당국도 `아차` 싶었고 설마하던 시장은 지지선이 붕괴됐다며 달러를 내다팔았습니다. 기업 자금 담당자들은 윗선에 불려가 "어찌된 일이냐, 왜 미리 안팔았냐"고 한 소리 들었고 언론은 당장 수출전선에 빨간불이 켜진 듯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1001원에서 1000원으로 떨어질 때와 1000원에서 999원으로 떨어질 때의 체감도는 하늘과 땅 차이인가 봅니다. 1원 차이로 자릿수가 바뀌었을 뿐인데 온 나라가 들썩들썩합니다.
환율이 떨어졌다는 것은 원화값이 올랐다는 얘기고 그만큼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이 튼튼해졌다는 해석도 나올 법 한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하나같이 끙끙앓는 소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국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입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밑에서 깔짝깔짝 이게 뭡니까. 시장이 X판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만든 게 누군데요? 당국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 때문일까요. 오늘 아침 재경부와 한국은행, 금융감독위원회, 산업자원부 관계자들이 은행회관에 모여 환율 관련 대책회의를 했어도 시장은 뜨뜻미지근합니다. 당국이 "지금의 시장은 비정상적이다" "모든 권한과 역량을 동원해 투기세력에 대응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외환시장은 환율이 떨어질 때마다 나오는 고정 레퍼토리로 여기는 눈치입니다.
일부에선 "정부 개입으로 1000원대 위에서라면 마음 편하게 팔 수 있고 999원 정도라도 파는 게 나쁠 것 같지는 않다. 개입 들어오면 바로 매도다"라고 공언할 정도입니다.
당국도 할 말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장의 `군집행동`을 꼽는데요. 기대가 한 곳으로 쏠리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경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전날 환율이 990원을 밑돌자 "이런 시장에서 못해먹겠다"는 하소연이 나오겠습니까.
당국도 가장 바람직한 외환시장 정책은 물흐는데로 가는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정부나 한은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개입`이라는 용어 대신 `미세조정(Smoothing Operation)`이라는 말을 즐겨쓰는 것도 그 밑바닥에는 시장을 존중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문제는 자율적인 조정기능이 제때 작동하지 않는 것마저 옳다고 하는 것에 있는데요, 종종 시장을 물신화(物神化)하는 것 같아 소름이 돋을 때가 있습니다. 당국도 지난달 중순부터 전개된 치열한 전투에서 이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외환시장 얘기로는 지난달 말부터 헤지펀드가 우리나라 외환시장에 달려든 것 같답니다. 전날에도 하루 거래량의 5분의 1 이상이 이와 관련된 자금이라는 얘기가 떠돌았습니다. 말레이시아 링기트, 싱가포르 달러, 태국 바트, 인도네시아 루피아 등 아시아 주요통화들도 최근 가파른 하락세를 보이고 있어 불안감을 더해주고 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외환시장이 당국을 믿지 않고 당국이 외환시장을 존중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은 걱정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듯 싶지만 환율 자릿수를 바꾼 1원의 차이처럼...
지금 시장과 당국의 거리는 그만큼 벌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참 가깝고 한편으론 너무나 먼 1원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