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보건당국의 '무리수'

  • 등록 2013-03-11 오후 2:01:00

    수정 2013-03-11 오후 2:01:00

[이데일리 천승현 기자] 보건당국이 4대 중증질환 보장성 강화에 대한 예산 점검을 위해 제약사들에 무리한 자료를 요청, 업계의 빈축을 사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은 최근 제약사에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암질환, 희귀난치성질환 등 4대 중증질환에 대해 의약품 허가신청(예정)일자, 효능·효과, 환자수, 보험급여 시 예상판매량 등을 제출하라는 협조 공문을 발송했다.

새 정부가 추진하는 4대 중증질환 보장성 강화에 대비하기 위한 사전 조사 차원이다. 새로운 약이 등재돼 판매될 경우 건강보험재정에서 소요되는 약품비를 미리 파악해보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제약업체들 입장에선 관련 자료를 제출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선 보건당국의 광범위한 자료 요청에 따라 기업 기밀이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개발 계획을 가진 제품의 예상판매량까지 미리 제시하는 것은 적잖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4대 중증질환 관련 제품을 어디까지 봐야 할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다. 환자들의 치료 상태에 따라서는 고혈압, 당뇨치료제, 위장약 등도 모두 4대 중증질환 치료 약물로 분류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판매중인 의약품의 매출 현황, 오리지널 제품의 특허만료 예정일 등을 통해 4대 중증질환의 약품비 파악이 충분히 가능해 심평원의 이번 자료 요청은 납득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제약사들은 또한 새롭게 내놓은 신약이 건강보험에 등재될 때 보건당국에 앞으로 예상판매량 등의 자료를 제출하고 있다.

제약사 한 관계자는 “이번 조치는 새 정부의 보장성 강화 업무의 책임 일부를 제약사들에 떠 넘기려 하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논란이 일자 심평원 측은 “참고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것일 뿐 자료 제출 여부는 의무사항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제품이 발매되기 전에 보건당국의 건강보험급여 등재 절차를 거쳐야 하는 제약사 입장에선 이번 자료 요청에 강제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 보건당국은 제약사들의 리베이트와 같은 불법 행위도 조사하기도 한다.

물론 면밀한 자료 검토를 통해 보장성 강화에 필요한 예산을 미리 점검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부의 단순한 협조 요청에도 개별 기업의 업무가 마비될 수 있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조금 더 신중한 행정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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