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물가를 안정적인 수준으로 유지, 관리한다는 큰 그림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관리의 대상인 물가 동향이 과거와는 사뭇 다른 구도로 형성되면서 물가에 대한 관심이나 견제 방식도 이전과는 사뭇 달라지게 됐다.
물가 수준에 대한 절대적인 경계 수위가 낮아진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중국, 구 소련연방 국가들의 글로벌 경제질서 편입을 들 수 있다. `철의 장막`, `죽의 장막`으로 외부세계와 철저히 단절됐던 국가들이 세계 경제의 막강한 후발주자로 등장하면서 기존의 물가 질서를 완전히 바꿔놨다.
박승 전임 한국은행 총재가 `미꾸라지 물가론`이라는 말로 대신했던 이 같은 물가구조의 변화는 금융시장 참가자들은 물론 물가를 직접적으로 컨트롤하는 중앙은행들의 입장에서도 적잖은 부담일 수 밖에 없었다. 낮은 물가 수준이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물가 안정을 외칠 명분도, 근거도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은 지난 수년간 금융시장에서 그다지 시장 참가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재료로 전락했다.
◇ 물가구조 변화가 중앙은행 역할 제한할 수 없다
물가는 이제 안정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물가 교란요인인 유가가 상승하더라도 이를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는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중앙은행들의 물가 목표치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목표치의 하한선을 밑도는 물가에 대해 인플레이션은 낡은 역사 교과서의 한구절 처럼 느껴질 뿐이다.
낮은 물가 압력은 중앙은행들의 행동반경을 넓히는 역할과 동시에 좁히는 역할도 담당했다. 인플레 압력이 크지 않는 상황에서 경기부양에 초점을 맞춘 통화정책의 집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실제 미국이 40년래 가장 낮은 정책금리 1%를 장기간 유지하고 우리 나라가 사실상 역사상 최저의 금리 수준을 유지한 것 역시 인플레에 대한 표면적인 부담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물가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고 해서 중앙은행은 더 이상 손을 놓고만 있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오`다.
모든 경제 현상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존재한다. 이럴수도 있지만 저럴수도 있고, 단기에는 좋지만 장기로는 나쁠 수도 있다는 이른바 `외팔이 경제학자` 논쟁을 항상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같은 낮은 금리가 인플레이션을 유발시킨다는 과정은 성립되지 않았으나 저금리는 그 존재 만으로도 발생시킬 수 있는 문제들을 동시에 몰고왔다. 다름아닌 최근 통화정책의 대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자산가격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 중앙은행은 불균형 시정의 파수꾼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단순히 거시 지표가 아닌 경제 전반의 불균형을 야기하는 현상으로 그 범위를 확장해서 해석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범위를 확장할 경우 자산가격 문제도 엄연하게 인플레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을 비롯해 정책당국이 인플레이션 문제에 그렇게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는 가장 큰 목적은 경제 주체들의 행동 왜곡이다. 높은 물가 상승률은 금융자산보다는 실물자산에 더 관심을 가도록 유도하며 이로 인해 그 이전에 형성된 균형은 깨어진다.
물론 여기서도 균형의 이탈이 경제를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유도하는 경우라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은행은 부동산을 포함해 최근 나타나고 있는 문제들을 장기간에 걸쳐 저금리 기조가 이어진데 따른 폐해로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인플레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불균형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역할론은 항상 한 쪽으로만 집중되거나 국한될 수 없다. 경제 구조가 달라지면 달라지는 데로, 물가가 달라지면 달라지는 데로 그 모습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중앙은행은 단순한 물가 지킴이에서 균형잡힌 성장의 파수꾼으로써 그 역할과 권한을 확대, 재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