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손발이 묶였다"고 토로한 한국은행, "더 이상 부양조치는 없다"는 일본은행, 말발이 약해진 그린스펀. 이들이 처한 곤혹스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금통위 이후 수익률 하락
9월 들어 국고3년 수익률은 5.3~5.4% 박스권에 갇혀있다. 박스를 위아래로 열고 나갈 것 같았던 시장은 주가하락을 등에 업고, 금통위 이후 일단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금통위에 콜금리 인상 압박을 가했던 논리는 "과잉 유동성이 부동산 투기를 부추겼으니 금리 인상으로 이를 막으라"는 것이었다. 한국은행도 이 점을 인정했다.
한은은 그러나 이라크 전쟁이 언제 터질 지 모르고, 수해 피해가 있으며, 추석까지 앞두고 있으니 이번달 콜금리를 유지하자며 여론을 달랬다. 부동산 문제는 정부의 대책이 효과를 보는지 지켜보자고 덧붙였다.
박승 한은 총재는 유동성을 조절한 준비가 다 돼 있었는데, 대외 경제 환경이 불안정해지면서 한은의 `손발이 묶였다`고 말했다. 한은의 손발을 묶은 것이 대외 요인뿐일까.
◇중앙은행 수난시대
한국은행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금리인상 압력을 받는 중앙은행이다. 일본은행은 제로 금리 정책과 계속되는 유동성 공급으로도 디플레를 타개하지 못해 전전긍긍이다. FRB도 9.11테러 1주년과 이라크 전쟁 등으로 추가 금리 인하를 은근히 요구받는 모습이다.
그린스펀 의장의 선문답식 코멘트는 위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고, 스스로 중앙은행의 역할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음을 시시하는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은행의 경우는 통화정책만으로는 `일본 병`이라는 난치병을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역시 1.75%라는 초저금리임에도 경기 회복이 불투명하다. 부동산 투기의 주범(?)으로 몰린 한국은행도 금리를 올려야만하지만 주변 사정이 금리 인상을 허용하지 않는 함정에 빠져버렸다.
이처럼 금리정책을 책임지는 중앙은행들이 자신의 뜻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침체된 경기를 끌어올리는 통화정책이 생각만큼 잘 제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금리를 내렸다면 경기가 돌아설만한데도 미국 경제는 오리무중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저금리가 경기 부양에 분명한 도움이 됐지만, 부동산 투기라는 골치아픈 부작용을 잉태했다.
통화정책주의자들의 이론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상황이다.
◇샤워실의 바보
정교한 통화정책이 케인즈 식의 직접적인 국가 개입보다 경제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원리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경기가 너무 식어서 뜨거운 물을 부으려고 샤워 콕을 뜨거운 물 쪽으로 너무 갑자기 돌기면 화상을 입는다. 얼결에 찬물로 콕을 돌리면 다시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오가며 샤워실은 만신창이가 된다.
통화정책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시장은 어떻게 대응해야할까.
◇대외요인, 펀더멘털
한은의 고백대로 대외요인을 살펴볼 수 밖에 없다. 한은이 샤워실에서 콕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리는 이유는 옷도 걸치지 못하고 샤워실 밖으로 대피해야할 상황, 공습경보가 울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일단 샤워실 자체가 안정됐다고 한다면 수도꼭지는 찬물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또 하나. 대외 불확실성이 언제, 어떻게 해소될 것인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샤워실 주인이 바뀔 수도 있는 것. 선거 국면에 다가갈수록 중앙은행의 행동은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정치적 중립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선거전에 돌입한 대선주자들은 금리를 올리거나 내리는 액션 자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인식하고 정치적 압력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내년 물가를 걱정해야할 정도로 국내 펀더멘털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것인지도 총체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박 총재는 기업들이 대규모 설비투자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총재 자신이 얘기했듯이 투자에 대한 수익률이 보장되지 않으면 기업들의 행동은 늦어질 수 밖에 없다. 자금 수요가 없는 채권시장에서 금리가 얼마나 상승 압력을 받을 것인지도 고민해봐야한다.
다음주에는 추석이 있다. 한은의 손발이 묶여있는 사이 시장참가자들은 풍성한 추석 선물을 받으려고 할 수도 있다. 채권수익률 전저점을 노리는 기관들이 도처에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