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의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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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운동 중 접한 ‘노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에 나는 다른 분인 줄 알았습니다. 투신이라는 말에 '그냥 미끄러지신 거겠지. 그 양반 스스로 목숨을 거둘 분이 아니야.'라고 단정했습니다. 그 날 오후 단국대에서 강의가 있었고, 학생들이 오지 못할 줄 알았다며 위로하는 말에 덜컥 내려앉는 가슴으로 강의 도중, 그냥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 순을 바라보시는 아버지가 내게 전화를 거셔서는 ‘문상은 언제 가느냐?’고 위로하시는 말씀에 대고 나는, ‘그까짓 일에...수많은 양민을 죽이고 수 천 억 원을 먹은 전직들도 고개를 들고 잘 사는 데 허망하게 세상 버리고 그렇게 간 분에게 문상은 무슨...’하며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굳은 내 눈망울은 한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지난 가을, ‘당신의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누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미안함을 전하던 내게 ‘장관자리에서 너무 빨리 내려오게 해서 내가 미안한데 무슨 소릴 하느냐’고 손사래를 치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날도 고향 자택, 몇 안 되는 관광객 앞에서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 ‘현 정부를 믿고 도와야 한다.’고 다독거리며 이런저런 우스갯소리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중에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미안합니다. 약속시간이 되었는데 이러고 있어서...’라며 미소 짓던 당신.
얼른 끝내고 같이 앉았던 그 서재에서 당신은 손으로 파리를 낚아채고는 나보고 파리를 잡았는지 내기하자던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내가 이겼죠. 당신의 그 실력으로는 파리를 잡을 수 없다고 말한 내가...
얼마 안 되는 연금으로 사는 데 지장이 없느냐는 물음에 ‘청량리 노숙자들은 하루 담배 한 값, 소주 한 병 살 수 있는 1500원만 있으면 행복해 한다.’는 말로 화답하였더니 당신은 ‘장관 그만 두더니 도를 통했다.’며 부럽다고 하셨죠.
그 때 '당신이 개혁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심하게 몰아붙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부분이지만 스스로 자기 목숨을 거두는 것은 진정 자연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니라는 말을 전했어야 했는데....
당신이 무슨 짓을 했더라도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을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상, 이 세상은 살만한 것인데 이토록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 하고 어찌 떠날 수 있었는지 묻고 또 묻고 싶습니다.
그 뒤로 다시 만나자는 말만을 남기고 우리는 이제 영원히, 이 세상에서는 마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난 오늘도 어김없이 당신을 마주합니다. 대통령으로서의 당신이 아니라 나의 철없는 응석과 투정까지도 믿음과 박수로 받아주었던 나의 ‘큰 형’으로, 웃으며 어깨동무하던 든든한 동반자로 두 눈과 마음을 꼭 부여잡습니다.
당신이 바보여서, 당신이 촌놈이어서, 그리고 그저 진실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을 좋아한 것은 아닙니다. 권력의 사치와 허세로 눈먼 여느 정치인들과는 다른, 그야말로 ‘남달랐던’ 당신이기에, 당신의 매력에 눈이 멀고, 첫눈에 당신을 짝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삶의 절반을 넘게 살아온 이 한 남자에게 감히 대한민국의 희망을 얘기할 수 있게 만든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지사가 되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제까지의 삶이 그래왔듯이 당신의 목숨을 걸어 이루고자 했던 당신의 큰 뜻을, 그리고 ‘원망하지 말라’는 그 마지막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렵니다.
당신은 갔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당신을 보낼 수 없습니다.
난 당신을 떠날 수 없습니다.
내가 마주했던 당신은 정말 진실하고 꾸밈이 없는 바보, 영웅, 그리고 사랑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바라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과 더불어 그리고, 그대를 그리는 바다와 함께 당신을 품고 살아갈 것입니다.
영면하소서.
최낙정 해양문화재단 이사장(전 해양수산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