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김수헌기자] 올 4월 삼성카드 대주주사인
삼성전자(005930) 임원들은 카드 유상증자 참여를 논의할 이사회를 앞두고 국제선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외국인 사외이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증자 참여 필요성, 그리고 참여 여부에 따른 회사와 주주손익 등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사외이사들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이사회를 열기조차 어려운 상황.
카드사태 이후 정부 주도로 대주주 회사들과 증자문제에 대한 협의가 사실상 마무리됐지만, 정부 주도의 카드 살리기 대책에 따라 참여해야 된다는 논리가 삼성전자 사외이사들에게 먹힐 리 없었다.
◇이사 찾아 해외로..`찾아가는 이사회`
특히나 외국인 사외이사들은 해외주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 철저하게 회사손익이나 주주이익을 따질 것이 뻔하다. 삼성전자 임원들은 증자에서 발생할 문제점을 파고드는 사외이사들을 상대로 증자참여가 회사에 마이너스보다는 플러스가 될 것이라는 분석을 집중적으로 설명했고, 이사들을 최종적으로 납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도 막상 4월7일 이사회를 열어보니 두시간 이상 이사들의 질문이 쏟아져 난상토론을 벌여야 했다. 삼성카드 유석렬 사장까지 삼성전자 이사회에 참석해 카드 재무상태와 구조조정방안, 향후 사업개선전망과 비전 등을 일일이 다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카드출자를 이사회 안건으로 올리기 전, 시민단체까지 찾아가 주당 출자가격 평가기관과 방식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사회, `통과의례` 아닌 `최대난관`
한국 재벌기업의 이사회에 대해 일부에서는 아직도 `거수기`라는 평가를 내린다. 이사회가 회사손익이나 주주이익을 꼼꼼히 따지기보다는 지배주주 이익을 대변하기 급급한 `통과의례`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재벌기업의 최고의사결정기구는 이사회가 아니라 지배주주라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재벌 지배구조개선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이사회의 투명한 의사결정과 독립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많은 재벌기업의 이사회는 이미 독립적인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자리잡고 있고, 투명성이나 독립성, 전문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버금가는 수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사회가 거수기라고요? 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해외지분이 60%를 향해 가고 있어요. 해외주주들이 지켜보고 있고, 시민단체도 눈을 부라리고 있습니다. 요즘 시민단체에 변호사나 회계사 등 전문가들이 다 포진해 있어요. 자칫하면 소송에 걸리는데, 의사결정의 투명성이나 절차의 합리성, 독립성이 없으면 이사회를 운영하기도 어려운 판입니다"
삼성 관계자는 이사회가 총수이익을 대변한다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삼성전자 이사진 13명 가운데 사외이사는 7명. 과반이 넘는다. 사외이사 가운데 해외주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국인 사외이사가 3명이나 된다. 요란 맘 이사는 GE 아시아퍼시픽 사장을 지냈고, 힐링거 이사는 크레딧스위스 투자매니저 출신이다. 이와사키 이사는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재팬 회장으로, 캐피탈펀드의 추천에 따라 이사선임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글로벌스탠더드에 특히나 익숙한 이들 사외이사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안건이 통과되기 어려운 구조다.
◇6개월만에 감사위원회만 9차례..`일하는 이사회`
SK(003600)(주) 서윤석 사외이사(이화여대 경영대학원장)는 "사외이사로서 존재이유를 실감하고 있다"면서 "여러 기업에서 사외이사를 해봤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이사회 내 활발한 토론문화, 6개 전문위원회를 통한 꼼꼼한 스크린, 사실상 사외이사들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구조, 회사 내 사외이사 사무실과 별도의 이사회 지원 사무국 운영 등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적 측면에서 글로벌 수준에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평가다.
지난 8월20일 SK 사외이사들은 자발적으로 윤리강령을 선포했다. 당시 사외이사들의 발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이사회가 거수기라는 말이 있는데, 안건을 이사회 내 6개 분과위에서 충분히 스크리닝을 한다"
"윤리강령은 양심에 따라 안건에 대해 각자 판단하고, 부당하다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양심에 따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오전에 감사위원회가 있었는데 6개월도 안돼 벌써 9차까지 진행됐다. 그 자리에서 SK해운의 상반기 경영상황을 보고 받았다"
LG전자의 권영수 부사장은 이같은 재벌기업 이사회의 변화에 대해 "특히 LG의 경우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이사회 운영이 강화됐다"고 말했다. 권 부사장은 "이사회 중심 경영은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에 투명경영은 곧 이사회 중심경영과 직결된다"고 말했다.
◇비밀계약도 이사회에 중간보고..투명성 높이라
이사회 지원을 담당하는 실무진이 전하는 재벌기업 이사회의 변화도 놀랍다. 이들은 "한국 이사회에 실질적 논의나 토론이 없었고, 이사회가 충실치 못했던 과거가 있었다"고 말한다.
LG전자 권오준 상무는 "LG 역시 안 그랬다고 할 수 없다"면서 "그러나 이에 대한 내부반성이 제기되고 변화를 위한 많은 노력들을 기울이면서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옛날에도 이사회 전에 안건자료를 사외이사들에게 보내긴 했지만 상당히 부실했다. 따라서 실제 이사회 당일 올라가는 자료와 차이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사전제공 자료 역시 완벽한 `버전`으로 만들어야 한다.
권 상무는 "이사회 5일전에 자료를 보내면 사외이사들이 전화상으로 이것저것 묻는 경우가 많다"면서 "특별한 안건이 있을 경우에는 미리 이사들을 찾아다니며 설명을 한다"고 말했다.
외부공개가 곤란한 계약같은 경우도 과거에는 막판에 이사회에 올리는 식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관행을 깨고 중간단계에서 한번 이사회에 보고한다. 사외이사들이 미리 내용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사들의 깐깐하고 꼼꼼한 요구에 대응할 수 없다. LG전자가 자회사인 LG필립스LCD 기업공개 때, 처음에는 구주매각을 하려다 시장상황이 안좋아 포기한 적이 있었다.
사외이사들은 이같은 상황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이들은 회사 실무진에게 "구주매각 포기가 회사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분석해서 이사회에 따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총 자산의 1%를 초과할 때만 이사회에서 심의하던 `타인지급보증` 규정을 고쳐, 모든 타인지급보증을 이사회가 심의토록 하는 등 이사회 권한을 확대한 사례도 있다.
LG카드 기업어음(CP) 인수를 결의한 LG전자 이사회에서 사외이사들은 모두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올 2월6일 열린 이사회에는 사내이사 3명, 사외이사 2명이 참석했다. 사외이사 4명 중 2명은 이사회 전에 아예 사퇴한 상황이었다.
사내이사들은 기업어음을 인수하지 않아 LG카드에 심각한 상황이 닥칠 경우 LG전자가 입을 피해와 이에 따른 주주이익 침해를 걱정했다. 하지만 사외이사들은 어음 부실화 가능성을 더 우려했다.
표결에서 사외이사 2명은 회사입장을 따르지 않았다. 이런 이사회를 거수기로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