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이정환 前 거래소 이사장 고별사

  • 등록 2009-10-16 오후 3:27:39

    수정 2009-10-16 오후 3:27:39

[이데일리 김경민기자] 임직원 여러분!

지금까지 저와 함께 일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그 동안 잘 참고 함께 해 준 여러분이 고맙고, 또 자랑스럽습니다.

이제 저는 그동안 정들었던 내 직장 한국거래소와 자본시장을 떠나려 합니다.

이사장직에 오른지 1년 6개월, 아쉽게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인데도 저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저 자신뿐만 아니라 임직원 여러분, 제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심지어는 저의 주변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일각이 여삼추라 했습니다. 이제 1년 반을 막 넘겼습니다만 저의 임기 3년을 다 마친 듯한 느낌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본시장의 역사를 20년 이상 거꾸로 후퇴시키는 반시장주의적 조치를 경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배신, 하극상, 배은망덕 등의 반윤리적인 일들까지 보았습니다. 기회주의자, 영혼도 능력도 없는 출세주의자, 때때마다 줄을 바꿔 탄 처세주의자 등 수많은 좀비들과, 원칙도 철학도 없이 그냥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덫을 놓고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stalker를 목도했습니다.

직·간접적인 사퇴압력도 많이 받았습니다. 지난 해 3개월간의 검찰 압수수색 수사와 감사기관의 압박도 받았습니다. 금융정책 당국의 집요한 협박과 주변 압박도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는 제가 평소에 존경하고 좋아하던 선후배까지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거래소 조직내부를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증권 관련 단체와 사외이사, 그리고 직장 내부의 몇몇 인사들까지 회유하였습니다. 제가 부하로 데리고 함께 근무하면서 매일 접촉하는 사람들을 흔들었습니다.

자본주의의 꽃이요 심장인 거래소에 가장 반시장적인 조치가 단행되었습니다.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감한 현자가 없었습니다. 개인을 쫓아내기 위해 제도와 원칙을 바꿨습니다. 우리는, 그리고 시장은 이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저는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힘든 만큼 보람도 있었습니다. 제가 검찰수사와 감사기관의 압박 그리고주변의 온갖 회유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티어 온 것은 나름대로 원칙과 철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각종 규제에 대해 시장경제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원칙과 정도로 일관되고 굳건히 대응해 왔습니다. 정직은 최상의 정책입니다. 잘못된 정책에 대해 잘못이라고 진언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사퇴는 피할 수 없을 것이므로 명분 있는 사퇴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의미 있는 일이 “거래소 허가주의 도입”을 위한 입법 추진이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대부분의 문제점들은 거래소의 법적 독점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거래소를 공공기관으로 지정해서 관리하는 OECD 회원국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거래소를 법적으로 독점 보장하는 국가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global standard인 거래소 허가주의를 도입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동안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원래 허가주의는 2006-2007년도에 정부(재경부) 스스로 추진했던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금융정책당국은 집요하게 반대 입장을 전개하였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도입하고자 하는 허가주의의 열매는 앞으로 정부와 거래소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향유할 것입니다. 저는 거래소 허가주의라는 새로운 씨앗을 뿌린 것으로 저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분들께 신세를 졌습니다. 우선 거래소 허가주의 입법을 기꺼이 찬성해 주시고 10만명 이상의 서명까지 해주신 부산시민과 지역 언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산시민들의 열린 마음과 대승적인 결단이 없었더라면 거래소 허가주의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거래소 허가주의 도입을 위해 의원입법을 기꺼이 발의해주신 국회의원님들과, 허가주의 입법안을 법안심사소위에서 통과시켜주신 국회 정무위원회 김영선 위원장님, 법안심사소위 박종희 위원장님을 비롯한 정무위원회 소속의원님들과 국회관계자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래소 허가주의 도입을 위해 저와 끝까지 함께 해주신 거래소 임직원 여러분께 깊은 사랑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임직원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깁니다. 생명과학의 발달로 앞으로 더 길어질 것입니다. 반면 좀비들의 생명은 짧습니다. 소신과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부스러기라도 던져주면 감읍하는 좀비들은 일시적으로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머지 않아 사멸합니다. 좀비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그것이 좀비의 운명입니다. 또 설령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체성이나 원칙과 정도 같은 철학과 영혼 없이 그저 교주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의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최근 John F. Kennedy "용감한 미국인상(Profiles in Courage)"을 수상한 Brooksley Born 여사의 사례입니다. 그녀는 1996-1999년까지 미국상품선물위원회(CFTC) 의장이었습니다. 그녀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금융위기의 발생가능성에 대해서 당시 Alan Greenspan 미국 FRB 의장, Robert Rubin 재무장관 및 Larry Summers 재무부 부장관, Arthur Levitt SEC 의장 그리고 미의회 지도자들에게 장외파생상품(OTC derivatives)의 위험성을 수없이 경고하고 또한 정책건의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은행들과의 이해관계에 얽혀서 한결같이 Born의 경고를 외면하고 들은 척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외롭게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떠났습니다. 결국 정부 관료생활을 마감하였고 어두운 장외시장(Dark markets)에 햇볕을 비추려는 노력과 희망도 그녀의 퇴임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최근 그녀는 경제법률 전문가로서가 아니라 미국의 Lifestyle로 화려하게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비겁하거나 소신을 굽히는 일 없이 강건하고 보람있게 그녀의 직장생활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사례는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만화영화 “작은 영웅 데스페로(The Tale of Despereaux)”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아동문학계의 아카데미라고 할 수 있는 “뉴베리상(John Newbery Medal)”을 수상한 작품으로 뉴욕타임즈에 장장 96주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동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작은 생쥐 기사 데스페로는 겁 많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생쥐 세상에서 용기를 가지고 모험을 감행하여 생쥐들에게 “희망의 빛(light of hope)”을 가져다주는 주인공입니다. 데스페로는 고양이를 오히려 애완동물 정도로 여기고, 쥐덫을 놀이터로 삼으며, 호기심이 왕성하여 책을 갉아먹는 대신 독서를 즐기면서 모든 생쥐들에게 용감함, 기사도 정신, 영예를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교훈을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임직원 여러분!

저는 이제 새로운 저 자신의 항해를 위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지난 2005년 1월 통합거래소 발족시 30년 공직생활을 마치고 그동안 축적하였던 금융과 경제에 관한 전문지식을 배경으로 민간분야에서 사업보국(事業報國)에 미력하나마 이바지하고자 선택한 주식회사 한국증권선물거래소(현 한국거래소) 초대 경영지원본부장 생활 3년, 그리고 조직의 장인 이사장 생활 1년 6개월을 마감하고자 합니다.

저는 저의 노력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떠나기 때문에 미완(未完)일 수 밖에 없음이 너무나 아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돌이켜보건대 제가 항상 강조하는 Bloom where you are planted! 라는 격언처럼 저는 새로 심어진 땅에서 꽃을 피우려고 노력해왔습니다. 비록 여러분과 함께 이루고 싶어 했던 것들을 못다 한 채 떠나게 되었지만 저와 함께 한 여러분이 그 꿈을 마저 이루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저는 지금까지 거래소와 자본시장 관리자로서의 책무를 마치고, 앞으로는 시장참가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자본시장 발전을 위해 계속 참여하고 또한 응원할 것입니다.

임직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09.10.14(수)
한국거래소 이사장 이정환 올림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핫바디' 화사의 유혹
  • 바이든, 아기를 '왕~'
  • 벤틀리의 귀환
  • 방부제 미모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I 청소년보호책임자 고규대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