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도의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중국·러시아 중심의 권위주의 진영간 신(新)냉전 구도가 우크라이나 전쟁 1년을 전후해 격화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거친 설전을 주고받은 게 대표적이다. 특히 이들은 모두 핵 무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지정학적 공포는 더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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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푸틴, ‘전쟁 1년’ 설전
2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오후 폴란드 왕궁 정원의 쿠비키 아케이드에서 한 20여분 연설을 통해 “푸틴은 언제든지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며 “이 전쟁은 절대로 필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이 미국과의 핵무기 통제 조약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뉴스타트) 참여 중단을 선언하며 서방 전쟁 책임론을 내세우자, 곧바로 이를 정면 반박한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가 지난 2010년 체결한 뉴스타트는 탈(脫)냉전을 상징하는 핵 군축 합의다. 두 나라가 각각 장거리 핵탄두 숫자를 1550개 이하로 제한하고 상호 사찰을 허용하기로 한 조약이다. 러시아의 뉴스타트 이탈은 그 자체로 핵 공포를 키울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두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나토가 분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두다 대통령은 “미국은 세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화답했다.
이날 비슷한 시각 중국 외교라인 최고위 인사인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은 모스크바를 찾아 푸틴 대통령 측근으로 알려진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연방안보회의 서기를 만났다. 왕 위원은 “양국 관계는 성숙하고 견고하다”며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서 어떠한 도전도 견뎌낼 것”이라고 했고, 파트루셰프 서기는 “두 나라가 서방에 맞서 함께 뭉쳐야 한다”고 했다. 파트루셰프 서기는 특히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대만, 홍콩, 신장, 티베트 문제를 두고 “중국을 지지한다”여 힘을 실었다.
일각에서는 왕 위원의 이번 러시아 방문이 중·러 정상회담을 앞둔 물밑 작업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시 주석이 오는 4월 또는 5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 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은 2019년 6월이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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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1년을 즈음해 뚜렷해진 신냉전 구도는 핵 공포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더 주목된다. 푸틴 대통령이 참여 중단을 선언한 뉴스타트는 미·러가 체결한 군비통제 조약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작동하던 것이다. 미국 국무부는 이미 지난해 말 러시아의 핵탄두 수가 1549기로 뉴스타트가 정한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푸틴 대통령이 초강수를 던진 것은 핵 대결 공포가 현실화할 수 있음을 뜻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핵실험을 하면 우리도 하겠다”고 공언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이 이날 “군비 통제 구조가 총체적으로 무너졌다”며 “핵무기 증가와 군비 통제 약화는 세계를 더 위험하게 만든다”고 토로한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다.
중국을 핵 군축 체제에 끌어들이려는 미국의 구상 역시 중·러 밀월관계 탓에 어그러지는 기류다. 양자간 핵 협정인 뉴스타트마저 무력화하는 마당에 중국까지 포함한 다자 군축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더 요원해져서다.
국제 비핵화단체인 글로벌제로의 존 울프스탈 선임고문은 뉴욕타임스(NYT)에 “러시아가 조약을 깨고 중국이 핵무기를 증강하고 북한이 미사일을 실험하고 이란이 무기급 우라늄 농축에 가까워지는 상황”이라며 “핵무기를 제한하고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어려운 시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