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이 매생이·주꾸미와 만났을 때

홍대 앞 ‘일공육 라면’
  • 등록 2006-07-20 오후 1:04:19

    수정 2006-07-20 오후 1:04:19

[조선일보 제공] 인스턴트 라면에 ‘중독’됐던 학창 시절, ‘영세한 고교생’의 소원 중 하나는 “매끼 라면만 먹고 살 수 없을까”였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소박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홍익대 앞 라면가게 ‘一?六라면’의 간판에는 실제로 “이제, 라면만 먹고 살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지난 해 6월 문을 연 이 조그마한 라면가게의 메뉴는 달랑 세 가지. 一라면(해물), ?라면(부대찌개), 六라면(매생이)이다. “밤 10시 6분에 먹는 라면이 가장 맛있다”는 일본의 한 설문결과에서 가게 이름의 아이디어를 얻었고, 세 종류 라면에 각각의 숫자를 임의로 붙였다고 했다. 가격은 5000원 균일. 라면 값 치고는 좀 비싼 것 아니냐며 살짝 ‘울컥’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에피타이저’의 풍성함과 ‘요리’에 가까운 메인 디시의 맛 때문에 꼬였던 심사가 자발적으로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우선 ‘무료 패키지’부터. 명함 절반만한 크기의 번듯한 연어 한 점을 올려놓은 샐러드를 시작으로, 아기 주먹만한 크기의 그릇에 담은 문어 찰밥(말린 문어 조각이 군데군데 숨어있다), 취향에 따라 땅콩 잼과 칠리소스를 발라 먹을 수 있는 식빵(물론 토스트기도 함께), 삶은 계란, 콜라(혹은 사이다)까지. 문어찰밥, 토스트, 계란, 음료수는 무한 리필. ‘一?六라면’에서는 이 착한 녀석들을 ‘무료 5형제’라고 불렀다.

六라면을 주문했던 건 전날의 숙취 탓이었다. 그릇 전체를 덮을 만큼 수북한 파를 파헤치자, 얇게 썬 소고기 안심 두 조각, 부드러운 순두부 한 덩이가 부끄러운 듯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고 평소 해장(解?)의 으뜸이라고 여겨왔던 향긋한 녹조식물 매생이가 면발과 뒤엉켜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고명처럼 얹은 미역과 숙주나물, 그리고 조랭이 떡이 감칠 맛을 더한다. 맑은 국물의 무난한 담백함이 전날 밤의 알코올을 땀구멍 바깥으로 밀어냈음은 물론이다.

이런 풍성함이 이 가격에 가능할까. 비결은 타협이다. 푸짐한 건더기를 제외하면, 면과 국물은 인스턴트 라면의 면과 스프를 그대로 사용한다. 매운 맛인 一라면(통통한 아귀살, 왕새우 한 마리, 홍합, 주꾸미, 작은 게 반 마리 등)·?라면(튼실한 소시지 2개, 치즈 한 장, 김치, 삽겹살 두 쪽 등)은 신라면, 六라면은 사골맛 라면의 면과 스프를 넣고 끓인다. 튀기지 않은 생면과 장인 정신 깃든 육수에 댈 바는 아니지만, 보통 라면 좋아하는 평범한 식객들에게는 훌륭한 고명에 뿌듯한 가격이다. 물론 캐치프레이즈처럼 이 집 라면만 먹고 살 수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홍익대 정문을 등지고 청기와 주유소 방향으로 2분 정도 걸어가면 오른쪽 푸르지오 상가 2층에 있다. 현관 앞의 식권자판기에 당황하지 말 것. 입장할 때 자판기에 현금을 넣고 자신이 먹을 식권을 산다. 테이블이 없다. ㄴ 자 모양의 바 앞에 놓인 14개의 개별 의자가 전부다. 24시간 연중무휴. 상가 주차장 이용 가능. 신용카드 불가. 끼니 때는 줄이 길다. (02) 3142-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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