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토미’ 한가마 200만원 ‘최고 쌀’로 부활

수확량 적고 관리 힘들어 천덕꾸러기로 거의 사라졌던 야생벼
전남 장흥군 운주마을 쇠똥구리 작목회 희망의 풍년가
  • 등록 2010-10-11 오전 11:12:55

    수정 2010-10-11 오전 11:12:55

[경향닷컴 제공] “한 가마니(80㎏)에 200만원 하는 쌀, 아십니까.”

전남 장흥군 용산면 운주마을 쇠똥구리 작목회에서 생산하는 ‘적토미(赤土米)’다. 낟알 색깔이 빨갛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적토미는 아무리 배고팠던 시절에도 눈길 한 번 받지 못하던 천덕꾸러기 야생벼였다. 그런데 ‘친환경’ ‘유기농’의 옷을 입히자, 일반미(13만~17만원)보다 10배 이상 높은 값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주문이 쏟아지지만, 대지 못할 정도다. 재배 농가들은 10일 “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을 실감한다”고 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운 오리에서 백조로 거듭난 것이다.

▲ 한국 최고가 쌀을 생산하는 전남 장흥 쇠똥구리마을 주민들이 10일 수확을 앞두고 고개를 숙인 적토미를 살피고 있다.

◇ 미운 오리에서 백조로 = 운주마을은 ‘쇠똥구리 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농사를 저농약·무농약·유기농으로 짓자 볼 수 없었던 쇠똥구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쇠똥구리는 생태계 복원을 일러주는 상징물이다. 바로 이 마을 앞 들판 5만㎡에 적토미가 고개를 숙인 채 익어가고 있다. 이달 말부터 11월 초까지 걷어들인다.

적토미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일부 지역에서 재배됐다. 그러나 수확량이 일반벼의 25%에 불과하고, 갈대처럼 키가 커 재배하기도 힘들었다.

홀대를 받던 적토미는 수확량 많은 벼 품종이 계속 보급되면서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지난 2000년, 운주마을 사람들이 일본 자연농법연구회와의 교류를 위해 규슈를 방문했을 때였다.

“어느 마을을 가보았더니 논 한구석에 붉은 잎의 키 큰 벼가 자라고 있더랑께요. 그래 ‘저 벼가 무엇이냐’고 물어봤는디….”

일본 사람들의 대답은 놀라웠다. 일제시대 때 한국농업을 연구하기 위해 바로 한국에서 가져온 벼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미 (적토미) 개량종까지 만들어 고소득을 올리고 있더랑께.”

◇ 일본에서 재수입한 우리 벼 = 일본인들의 부연설명에 운주마을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다. 즉 적토미에는 염증이나 노화를 막아주는 폴리페놀 성분이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적토미) 개량종을 가져가 심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운주마을 사람들은 개량종보다는 원래의 적토미를 달라고 했다. 개량종보다는 우리 벼를 심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동네 논에 적토미를 심었지만 키가 150~175㎝나 자랐다. 약한 바람에도 쓰러졌다. 수십년 동안 영양가 높은 화학비료가 땅에 뿌려진 탓이었다. 또 해충도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처음 본 품종이어서 호기심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5년여 시행착오를 거쳐 겨우 ‘키우는 법’을 찾아냈다. 갈등도 많았다. 재배농가들끼리 한 ‘농약·화학비료를 쓰지 말자’는 약속도 번번이 깨졌기 때문이다.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지난해부터 본격 생산할 수 있었다.

◇ “서로 달라” 아우성 = 작목회 스스로 엄격한 검증을 거쳐 생산한 적토미는 날개 돋친 듯 나가고 있다.

지난해 적토미를 1만8000여㎡에 심어, 30가마(80㎏들이)를 생산했다. ‘고대미’라는 상표가 붙여져 백화점과 농협 등을 통해 ㎏당 2만5000원에 모두 팔렸다.

올해는 한 화장품 회사로부터 대량 주문이 들어와 재배 면적을 5만㎡로 크게 늘렸다. 피부에 좋은 폴리페놀 성분이 100g당 92㎎으로 일반미보다 최고 700배나 많고, 혈압을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피부 산화 예방용 화장품 ‘스킨 푸드’라는 제품이 나왔다. 쌀뜨물로 세수를 하면 피부가 촉촉해지는 원리를 살렸다.

올해 3만9000㎡를 재배한 한창본씨(46)는 “올해 한 대기업 식품회사에서 수확량 전부 사겠다고 제의해왔으나 단골도 많아 거절했다”면서 “유기농으로 쌀농사를 짓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분들에게만 종자를 드린다”고 말했다.

적토미와 일반미를 3 대 7 비율로 섞어야 밥맛이 난다. 적토미만으로 밥을 지으면 약간 거칠다. 고소한 맛과 향기도 다른 쌀과 비교될 만큼 짙게 풍긴다. 이삭이 한창 익을 무렵에는 논이 빨갛게 물들면서 주변의 황금색 들판과 어울려 볼 만하다.

서학수 전 영남대 식물자원학부 교수는 “옛 문헌에 적토미가 재배돼 제수용으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적토미는 다른 신품종을 만드는 데도 소중한 유전자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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