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이 1시간 남짓 남았지만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기자들은 벌써부터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진 찍기 좋은 통로 좌석은 이미 채워진 지 오래였다. 이날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 대학 교수.
|
드디어 오후 2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렸다. 플래시 세례는 외신기자센터 관계자가 기자회견을 시작하기 위해 마이크를 들 때까지도 진정되지 않았다.
기자회견의 주제는 그의 저서 `공황경제학의 도래와 2008년의 위기(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 and The Crisis of 2008)`였다. 1999년 발간된 책을 최근 위기 상황을 업데이트해 수정 발간한 책이다. 책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함께 바로 질의응답 세션으로 넘어갔다.
세계 각국 기자들의 질문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중국, 일본, 대만, 인도 등 아시아는 물론 독일, 프랑스, 덴마크, 오스트리아, 벨기에, 슬로바키아 등 유럽, 브라질 등 남미, 심지어 남아프리카의 기자까지 글로벌 금융위기의 타격을 입은 자국 경제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묻고 또 물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순간마다 수많은 기자들의 마이크를 향한 손짓이 줄을 이었다.
마치 `명의`를 찾아온 `환자`들을 방불케 했다. 월가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의 상처가 지구촌 곳곳을 파고 들었음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그러나 크루그먼 교수의 대답은 매몰찼다. 최근 일부 기대보다 호전된 지표들이 나오면서 투자심리가 살아났지만 진짜 반등의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 그는 "사람들이 앞서가고 있다"고 경계했다.
그렇다면 위기 탈출 전략은. 이에 대해서도 크루그먼 교수는 이렇다 할 `모델`이 없음을 고백했다. 1930년대 대공황의 탈출은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끝났지만 2차 대전이 어떻게 경제를 확장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중이고,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한 일본은 수출 호황으로 빠져 나왔는데 현재 글로벌 경제 전체가 침체돼 있어 이 역시 모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결국 기자들은 희망을 품을 만한 뚜렷한 근거도, 이렇다 할 해결책도 얻지 못한 채 뿔뿔이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첫째, 산업생산, 주택착공 등의 지표를 봤을 때 상황은 여전히 악화되고 있다. 특히 최근 산업생산은 10년래 최저치다.
둘째, 금융권의 좋은 실적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예컨데 골드만삭스는 투자은행에서 금융지주회사로 바뀌면서 실적이 나빴을 게 뻔한 지난해 12월을 분기 실적에서 뺐다.
셋째, 대공황 때에도 상황이 계속 나빠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휴지기가 있었다.
넷째, 경기후퇴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2001년 경기후퇴는 공식적으로 8개월만에 끝났지만 실업률은 1년 반 이상 상승세를 지속했다. 미국의 실업률이 2010년까지 계속 상승한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소 서운할 정도로 비관적인 그의 쓴소리 이면에는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유일한 해답이 숨어 있다.
첫번째는 끈기(Persistence)다. "역사적으로 아무리 혹독한 경제위기라도 항상 끝이 있었다. 다만 그 끝이 빨리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렇다고 모두 우울해 할 필요는 없다. 해답은 끈기다"
두번째는 섣부른 낙관론이 초래할 정책적 실수에 대한 경계다. "`경제회복`이라는 병아리가 부화하기 전에 숫자를 세지 마라(Don’t count your recoveries before they’re hatched)"
최근 `바닥이냐, 아니냐`를 두고 온갖 예측이 난무한다. 부화뇌동(附和雷同) 하기 보다는 크루그먼 교수가 제시한 해답을 되새겨보자. 이는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나가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