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환의 크레딧스토리)고래 찬가

  • 등록 2007-08-30 오후 1:42:20

    수정 2007-08-30 오후 1:42:20

[이데일리 윤영환 칼럼니스트] ‘로마인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유난히 강조한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와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와 꽃의 도시 피렌체의 엇갈린 운명을 풀어가는 첫번째 화두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강자의 헌신과 관용을 통한 공존의 지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지혜인 이유는 희생과 솔선수범을 통해 획득한 명예와 존경이야말로 장기적으로 강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생태계(Business Eco-system)라는 경영학 이론이 있다. 비즈니스를 바라보는 시야를 확대하여 자사가 속한 비즈니스 생태계 전체의 관점에서 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의 상호의존성을 인지하고 공생공멸의 운명체 의식을 바탕으로 생태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기업이 Win-Win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을 강조한다.

우리의 금융시장도 마찬가지다. 나만의 성공, 제로섬의 승리는 일시적이다. 금융시장이 함께 도약해야 지속 가능한 진짜 성공이 된다.

◇ 시장의 규율

금융 시장에는 예민한 이해관계를 명확히 하고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귀찮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세세한 게임의 법칙들이 얽혀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는 정책당국의 규제가 아닌 시장 스스로 만든 규율도 적지않다. 이른바 시장의 규율(Market discipline)이다.

시장의 규율은 누가 만드는가? 대부분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관행이지만, 결정적으로 시장의 흐름을 바꾸는 규율은 누군가의 인위적인 작용으로 만들어진다. 시장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과 비전을 바탕으로 시장을 이끄는 노블리스, 마켓리더에 대해 주목하는 이유다.

시장이 선진화될수록 이런 노블리스의 역할이 더욱 빛을 발한다. 워렌 버핏이나 빌 그로스는 단순히 수익률만 좋은 투자자가 아니다. 그들이 존경 받는 이유는 단지 새로운 투자영역을 개척하고 남다른 투자철학을 선보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차대한 순간에 시장의 규율을 잡아주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영웅은 따로 있다. 오늘날 국제적으로 채권투자의 중심 축이 되어 있는 신용평가가 자리를 잡게 된 데는 바로 연기금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선진금융시장에서 연기금은 당국의 규제욕구와 시장의 야성 사이에서 균형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수익률 이상으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투자철학의 성숙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시장의 관행으로 정착된 거래기관 평가와 배분 시스템도 처음에는 일부 대형 기관의 튀는 행동이었다. 대형 연기금이 데이터 서비스를 요구하고 신용분석 서비스를 챙기면서 대부분의 주요 증권사 라인업이 강화되었다. 역시 우리나라도 연기금이 시장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음을 절절하게 느낀다. 특히 채권분야는 더욱 그러하다.

◇ 함께 하는 꿈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큰 것은 욕심이 지나치기 때문인가? 특히 회사채와 관련해서는 당국의 규제보다는 시장의 관행으로 풀어야 할 것들이 많다. 우리가 규제로 엮어낸 신용평가나 시가평가도 선진시장에서는 관행과 시장의 규율로 일군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규제로 관행을 대신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런 부분들을 우리 시장의 노블리스가 해결해주면 어떨까?

지난 연말 감독당국이 발표한 회사채 발행시장 정상화 방안의 핵심은 주관증권사의 차별화다. 그런데 이를 시장의 규율이나 관행이 아닌 규제로 풀어가자니 여간 자연스럽지 못하고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는 발행시장, 특히 도를 넘어선 대형 발행기업의 횡포는 이해관계의 차원을 넘어서 시장의 안정을 위협하는 수준이 되고 있다. 어른의 큰 기침이 필요하다.

최근 연기금의 은행채 편식을 지적하는 기사가 있었다. 기사의 논조와는 별개로 우리 연기금의 현실적 어려움이 묻어난다. 연기금의 막대한 자산운용 규모를 감안할 때 자잘해진 회사채나 펀드시장과는 영 보조를 맞추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회사채와 펀드시장의 옹색함은 결코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고래가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큰 물을 만들 수 있다.

시장이 가야 할 방향은 별로 이견이 없다. 펀드를 대형화, 장기화하고 신용분석에 기초한 투자문화를 정착해야 한다. 정책도 결국은 이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정책에만 의존해서 될 일이 아니다. 고래가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몇 가지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기본적으로 고래들의 연대는 취약하다. 서로의 태생이 다르니 프로토콜이 다르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탄탄하지 않다. 일부 영악한 고래의 탐식과 몰염치, 역선택과 무임승차는 연대를 해친다. 연대의 법적 기반도 문제다. 애당초 구속력은 기대할 수 없고, 자칫 공정거래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그래서 대개 어떤 큰 고래가 총대를 메고, 다른 고래들은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구조가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철학의 문제다. 왜 하필 우리가 총대를 메어야 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보다는 구현하고자 하는 미래상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한다. 시장의 공론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당장은 실천이 담보되지 않더라도 분분히 견해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현실이 된다.

“나 혼자 꿈을 꾸면 그건 한낱 꿈일 뿐이지만, 우리 모두 함께 꿈을 꾸면 그건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다.” -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환경건축가, 오스트리아 -

◇ 고래에 의한 평화
 
작지만 너무나 현실적으로 절실한 우리 회사채시장의 꿈을 몇 가지 적어본다.

회사채 발행단위를 키워야 한다. 회사채를 연간 몇 번씩이나 작은 규모로 쪼개서 발행하는 우리의 관행으로는 시장의 활성화가 어렵다. 국채만 통합발행(Fungible issue)하는 것이 아니다. 게릴라식으로 신용등급과 평판, 그리고 네트워크와 시장 분위기에 편승하여 뚝딱 해치우는 방식은 너무 재미없다. 기업의 장기전략을 홍보도 하고 이에 대한 심층 분석과 토론도 이루어지는 한마당 큰 잔치가 되어야 한다.

발행단위가 작다 보니 연기금과 같은 대형 투자자의 참여가 쉽지 않을 뿐더러, 유통물량의 실종으로 원활한 가격형성이 되지 않는다. 발행시장 강세와 유통시장 약세는 종국에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치킨게임이다. 발행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일견 좋아 보이지만, 취약해진 시장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안정적 자금 조달이 우선인 기업이다.

또한 시장에 의한 신용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신용등급과 평가보고서는 절대 홀로 설 수 없다. 시장의 분석과 평가가 함께 해야 가치가 있다. 평가사에만 의존하는 구조로는 우리 회사채시장은 영원히 손님이다. 얻어먹는 밥으로는 건강을 유지할 수 없다. 적어도 주관증권사라면 반드시 정성을 기울여 한 상 차린 신용분석 서비스를 함께 제공해야 한다.

시장에 의한 차별화가 필요하다. 신용등급은 평가사의 주관적 판단일 뿐이다. 시장의 목소리, 투자자의 이해를 모두 반영하지 못한다. 대형 투자자의 칼 같은 차별화가 중요한 이유다. 단지 신용등급과 가격의 변동 가능성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투자자를 존중하는지 발행기업에게, 평가사에게, 온갖 중개자에게 따져 물어야 한다. 그러면 ‘고래의 시대’, ‘고래에 의한 회사채시장의 평화와 번영’이 시작된다.

윤영환/굿모닝신한증권/Credit analy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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