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선줄에 빼곡하게 앉아있는 참새들 | |
호수를 따라 돌다 보니 가트가 나온다. 성스러운 물에 영혼의 때와 마음의 죄를 씻어버리려는 힌두인들은 땡볕 아래서 말없이 의식을 행하고 있다. 조용히 꽃을 물에 띄워보내고 물에 몸을 담그며 기도를 올린다.
이 조용한 성지가 좋았다. 이 풍경과 이 분위기 그대로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런데 갑자기 저쪽에서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저쪽 멀리서 뚱뚱한 아저씨가 팔을 엑스로 겹쳐서 보여주며 소리를 지른다. 아마도 사진을 찍지 말라는 뜻인듯 하다.
바라나시의 화장가트나 힌두사원 같은 곳에서는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곳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고 언질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뜨끔한 마음에 얼른 사진기를 가방에 넣고는 다른 곳을 보면서 딴청을 피웠다. 그런데도 저쪽에서 계속 소리를 지른다. 힐끗 쳐다보니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는 듯 하다.
영문도 몰랐고 별로 끌리지도 않았지만 그 아저씨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가 궁금해서 일단 건물 모서리를 돌아 아저씨 앞에 섰다.
▲ 푸쉬카르 호주 가트에서 꽃을 띄우고 기도를 하는 인도인들 | |
뭔가 미심쩍었지만 일단 무료라는 말에 아저씨를 따라 가트의 시멘트 계단에 앉았다. 일행은 세명인데 각자 흩어져야 한단다. 서로 멀직이 떨어진 자리를 지정해주고는 가서 앉으라는 제스추어를 취한다.
시키는대로 쭈뼛쭈뼛 가서 앉았더니 세명의 남자가 꽃과 빨간 가루, 쌀알이 담겨진 작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중 한 남자가 옆에 와서 앉았다.
'무슨 이상한 의식을 행하려나..' 덜컥 겁이 났다. 정신적인 스승을 찾으러 인도를 찾았다가 사이비 수행자를 만나 감금과 폭행을 당하고 정신병자가 되어 끌려다니거나 손발이 잘려 앵벌이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더다라는 식의 끔찍한 얘기를 들은터였다.
일단 이 남자는 무표정하게 가족이 몇 명인지, 결혼은 했는지를 묻는다. 인도에는 언제 왔으며 얼마나 머물 것인지, 다음 행선지는 어디인지를 말하란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듯 성의없이 질문을 툭툭 던진다.
"아버지의 건강을 빌고, 어머니의 건강을 빌고, 동생의 건강을 빌고, 나의 건강을 빌고..."
"아버지의 건강을 빌고, 어머니의 건강을 빌고, 동생의 건강을 빌고, 나의 건강을 빌고..."
"아버지의 영적 평화를 바라고, 어머니의 영적 평화를 바라고, 동생의 영적 평화를 바라고..."
"아버지의.. 뭐라고 그랬었지?? "
"영적 평화"
"아.. 아버지의 영적 평화를 바라고, 어머니의 영적 평화를 바라고, 동생의..."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아버지의 OOO를 바라고, 어머니의 OOO를 바라고, 동생의 OOO를 바라고.."
도저히 OOO부분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몇 번을 물어도 영어단어가 아니거나 내 머리속에 들어있는 어휘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단어인듯 하다. 비슷한 발음으로 대충 넘겼다.
▲ 푸쉬카르 호수의 한가로운 풍경 | |
다음 의식은 쟁반 위에 있던 꽃을 호수 위에 띄우는 것이다. 주황색 금잔화를 손에 얹어주길래 짧은 기도와 함께 물에 곱게 띄워보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제 패스포트를 주겠단다. 드디어 목표물을 손에 쥐는구나 싶었다. 길거리에서 긴 설문조사 열심히 답해주고 마지막에 기념품을 받기 전의 느낌이랄까.
그런데 지금까지 드린 기도는 기부금을 내야 효력이 있기 때문에 많이 낼 수록 좋은데 최소 300달러는 내야 한단다. 그럼 그렇지..무료일리가..그런데 금액이 너무 높다.
"300루피가 아니고 300달러? 확실히 달러 맞아?" 몇 번을 확인해도 천연덕스럽게 "US달러 몰라? 달러?" 이러면서 아예 주머니에서 1달러를 꺼내서 보여준다. 어느 여행자에게 갈취한 것이 틀림없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다른 일행들을 소리쳐 불렀다. 큰 소리로 부르자 이 남자는 다급하게 막아섰다. 눈을 부릅 뜨고서는 의식중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 불행이 닥친다고 경고를 날린다. 두명 모두 아직도 주문을 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쳐다보지도 않는다.
일단 달러도 없고 인도 루피도 많지 않다고 둘러댔다. 꼭 내야 한다는 최소 기부금 액수가 300달러에서 200달러, 100달러로 계속 떨어졌다. 그래도 복지부동이자 한숨을 푹푹 내쉰다. 영락없는 장삿꾼 표정이다.
이제는 루피로 협상을 시작한다. 1000루피에서 시작해서 점점 떨어졌다. 계속 반응이 없자 얼마를 낼 수 있냐고 물어본다.
"가난한 배낭여행자라 돈이 없거든. 30루피 이상 못 내" 딱 잘라 말했더니 그거라도 내란다.
지갑을 열었더니 잔돈이 없다. 결국 50루피를 강탈당하고서야 자유로운 몸이 됐다.
일행에게 갔더니 한창 협상에 접어든 상태다. 둘다 지갑을 안 가져왔다고 버텨서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넣었던 10루피 지폐로 해결하고는 패스포트를 얻었다. 실 몇가닥을 꼬아놓은 팔찌다.
생각해보니 나는 기부금을 가장 많이 내고도 패스포트를 못 얻었다. 냅다 달려가 팔찌를 내놓으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준다.
앞으로 이 팔찌가 있으면 가트 어느 곳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머리에 빨간 점을 찍고 손목에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짠 팔찌를 하고 있으려니 진짜 힌두교도가 된 느낌이다.
아까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호통쳤던 남자와 기부금 안내면 불행이 닥친다고 진지하게 협박했던 이들은 이제 평범한 인도 남자들로 돌아와 같이 사진을 찍자고 난리다. 사진이 잘 나오는 장소까지 가르쳐주며 안내한다.
이것도 사기당했다고 해야 하나..어찌됐든 인도 여행 내내 50루피 주고 얻은 패스포트를 손목에 차고 어느 도시를 가든 당당하게 가트를 걸어다녔다.
▲ 한낮의 푸쉬카르 호수, 조용하고 한가롭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