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인 뉴욕)미국도 `신파`가 좋아

  • 등록 2005-10-11 오후 1:34:23

    수정 2005-10-16 오전 11:09:00

[뉴욕=이데일리 하정민특파원] 칙 플릭(chick flick)이란 말이 있다. "계집애들이나 보는 영화"란 뜻을 지닌 이 속어는 그 광범위한 대중성을 인정받아 최근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미리엄 웹스터 사전에도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렸다.

남녀 주인공이 티격태격 사랑 싸움을 벌인 끝에 "결국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결말을 내는 영화, `러브 스토리`처럼 불치병과 지고지순한 사랑이란 진부한 소재로 눈물샘을 짜내는 영화 등이 모두 칙 플릭에 포함된다. 간단히 압축해서 `신파 사랑 영화=칙 플릭`이다.

여자들이 쿵푸와 가라데가 난무하는 무협권법 영화에 치를 떠는 것처럼 남자들도 멜로 영화에 하품을 연발한다. 같은 여자 중에서도 사랑 영화에 열광하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다.

뉴욕 싱글 여성의 삶에 대한 `환상`만 한껏 부추긴 `섹스 앤 더 시티`의 에피소드 한 장면. 네 주인공 중 캐리, 샬롯, 미란다가 로버트 레드포드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주연한 공전의 히트작 `추억(the way we were)`를 거론하며 열심히 영화 주제가를 부른다. 섹스의 화신인 사만다는 "그런 영화가 있냐"며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다른 친구들이 "너 외계인이냐. 어떻게 그 영화를 안 봤을 수 있니?"고 하자 사만다는 단칼에 "chick flick이니까"라고 답한다.

예측가능한 뻔한 결말과 안이한 현실 인식 때문에 많은 비판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사랑 영화의 힘은 세다. 한국에서 정통 멜로 `너는 내 운명`이 올가을 극장가를 점령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가을 극장가에서는 정통 로맨틱 코미디 `천국과 똑같이(Just Like Heaven)`가 선전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금발이 너무해`, `스위트 앨라배마`의 연이은 히트로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으로 떠오른 리즈 위더스푼과 `인 더 컷`, `유 캔 카운트 온 미` 등의 작가 영화에 주로 출연했던 마크 러팔로다. 지난달 16일 개봉해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이후에도 순항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병원의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26세의 외과 의사 엘리자베스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영혼이 된다. 죽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 눈에 띄지 않는 혼령이 된 것.

엘리자베스는 단 한 사람의 눈에 보이는 데 그는 바로 자신의 살던 아파트에 새로 이사 온 홀아비 건축가 데이빗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아파트를 내주지 않으려고 데이빗과 티격태격 다투다 사랑에 빠지고 엘리자베스를 혼령 상태에서 구하려는 두 사람의 좌충우돌 노력이 상큼발랄하게 그려진다.

이 영화의 결말을 언급하는 것은 삼가겠다. 다만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데미 무어와 패트릭 스웨이지가 출연한 `사랑과 영혼(Ghost)`, 멕 라이언과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천사의 도시(City of Angel)`를 절반씩 합쳐 딱 나눠놓았다.

집을 두고 영혼과 사람이 접전을 벌인다는 점에서는 지난해 개봉한 차승원, 장서희 주연의 한국 영화 `귀신이 산다`와도 매우 유사하다.

소재의 독창성이 `금발이 너무해`나 `스위트 앨라배마`보다 떨어지는 이 영화를 별 거부감없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주연배우들의 호연 덕이다.

여배우 치고는 그다지 예쁜 외모가 아닌, 주걱턱까지 지닌 리즈 위더스푼은 엉뚱하고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을 자연스럽게 소화한다.

벌써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한 `아줌마 중의 아줌마`이지만 1976년생이라는 어린 나이 덕인지 사랑 영화의 여주인공 역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마크 러팔로도 믿음직하고 헌신적인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주연 배우의 지명도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즐길만한 영화다. 더군다나 옆구리 시려오는 가을 아닌가.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기분이 즐거워지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영화 내용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면야 후회는 없을 듯하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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