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이종석기자] 기업공개에 대한 재계의 호응이 부족하자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사태로 까지 발전했다.
74년 5월29일 박 대통령은 내각에 이른바 ‘5.29 특별지시’를 하달한다. 당시 기업인들의 전근대적인 경영방식에 경종을 울리고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 대통령의 특별지시
박 대통령은 5.29 특별지시를 통해 ▲비공개 대기업에 대한 여신관리를 강화하고 ▲비공개 기업과 그 대주주에 대해서는 여신 및 납세 상황을 종합관리할 것 등을 공개적으로 지시했다. 비공개 대기업과 대주주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라는 엄포였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재무부는 바로 다음날 ‘금융여신과 기업소유 집중에 대한 긴급대책’을 발표하는 등 후속조치에 착수했다.
정부는 우선 50억원 이상 여신을 받고 있는 계열집단을 A,B군으로 분류했다. 이중 재무구조가 양호한 B군에 속한 기업들에 대해서는 공개적격성 및 증시 상황 등을 감안해 기업공개촉진법에 의한 공개지정권을 발동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재무부 이재국, 한국의 금융정책)
5.29 특별지시를 기점으로 비공개 기업에 대해서는 역차별적 불이익을 주겠다는 정책의지가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이 같은 강제조치와 함께 대기업 소유주에 대한 회유책도 병행했다. 김성곤 쌍용양회 회장에 대한 정부의 공개 권유가 이뤄진 것도 바로 이 즈음의 일이다.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의 회고.
“기업공개정책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경제단체의 자발적 호응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던 김성곤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쌍용그룹의 주력기업인 쌍용양회의 공개를 선언해달라고 요청했지요. 김 회장은 “그룹뿐 아니라 가문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니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대답한 뒤 돌아갔습니다. ”
김용환 장관의 기업공개 요청을 받은 김성곤 회장은 결국 7월8일 기자회견을 갖고 “5.29 특별지시에 적극 호응해 기업공개에 앞장서기로 했다”며 쌍용양회의 공개를 선언하게 된다.
당시 기업공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재계와 정부간 미묘한 줄다리기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80년대 들어 기업공개 붐
하지만 쌍용양회의 공개 선언 이후로도 대기업의 기업공개는 여전히 부진했다.
5.29 조치 이후 1년여 동안 48개 기업이 공개를 단행했지만 계열기업군 중 우량기업으로 인정된 주력업체의 공개는 거의 없었다. 정작 공개해야 할 알짜 대표기업들은 쏙 빠진 채 중소형 업체들만 형식적으로 공개에 나선 셈이었다.
정부는 주력기업의 공개를 촉구하기 위해 75년 8월8일 ‘기업공개 보완시책’을 추가로 발표한다.
8.8 보완시책은 국민적 대기업의 기준을 정해 이에 해당되는 대기업들의 공개를 규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유망 대기업들이 먼저 공개에 나서라는 촉구였다.
8.8 시책은 공개대상 대기업의 선정기준으로 ▲계열기업군의 주력기업 ▲외형기준 100대 기업 ▲300만달러 이상 차관도입 기업 ▲수출실적순 100대 기업 ▲투자공사 실사 결과 적격법인 ▲중화학공업 기업 등 6가지를 제시했다. 대기업들의 경영자료를 매년 분석해 이 기준에 중복 적용되는 업체를 우선공개대상으로 지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보완시책 발표 2개월 후인 10월6일 재무부는 마침내 제1차 공개대상법인 104개사를 선정, 발표함으로써 8.8시책의 구체적인 집행에 들어갔다.
기업공개촉진법 → 5.29특별지시 → 8.8보완시책 등 일련의 공개유도 정책이 이어지면서 기업인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고, 공개기업 수도 조금씩 늘어났다. 79년 들어 309개 기업이 공개됐고, 전체 상장회사 수는 355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기업공개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80년대 중반 들어서면서 부터다. 85년 이후 계속된 증권시장의 장기 활황과 정부의 우량주식 공급확대 시책 등에 힘입어 87년부터 기업공개와 상장이 러쉬를 이뤘다. 88년 들어 거래소 상장업체 수가 처음으로 500개를 넘어섰으며, 95년에는 700개를 돌파했다.
이후 99년 코스닥시장이 개설되면서 상장 및 등록 기업을 합쳐 1000개사를 넘는 "상장기업 네자리수" 시대를 열었다. 2005년 6월 현재 상장사 수는 거래소 680개, 코스닥 876개를 합쳐 총 1556개사에 이른다.
◇ 실패로 끝난 ‘국민주’
80년대 후반들어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를 통한 경영능률 향상과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재분배, 증권시장 투자저변 확대 등을 목적으로 대대적인 국민주 보급에 나섰다.
경제성장 과정에서 축적된 공기업의 이익을 국민들에게 환원하고, 향후 기대되는 기업 성장의 과실을 저소득층도 향유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도였다.
정부는 87년 12월 포철 한전 등 국민주 대상기업을 선정하고, 향후 5년간 5조원 상당의 주식을 매각하는 내용의 “국민주 보급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88년 4월 첫 단계로 포항종합제철 주식 가운데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3128만주(매출규모 4133억원)가 주당 1만5000원(할인매입자 및 신탁가입자는 30% 할인된 1만500원)에 매각됐다. 300만명 이상이 포철주 매입에 나섰으며, 증권시장 시가총액은 단번에 8000억원 이상 늘어났다.
이듬해인 89년에는 한국전력공사 주식 1억2775만주가 국민주로 매각됐다. 청약자수가 600만명을 넘어섰고, 상장 당일 시가총액은 14조원이나 급증했다.
이후 94년 국민은행 주식 2100억원 어치가 공모됐고, 정부 소유 한국통신 주식도 매각돼 국민주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국민주가 단기차익을 노리고 보급 직후 곧바로 매매되어 버렸다. 해당 기업의 지분은 다시 소수의 대주주에게 집중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주식 분산소유’와 ‘소득 재분배’라는 거창한 목적 아래 도입된 국민주 제도는 결국 그 도입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