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인프라가 없는 탓이다. 일본에서 신용카드를 새로 받으려면 카드회사는 개인정보를 확인해주는 대형기관에 의뢰하고, 이곳은 각 기관마다 서면서류를 보내 고객의 신용정보와 금융실적을 일일이 받고 확인한다. 일본에서 8년째 거주하고 있는 원미라씨(38)는 “한국 같은 속도는 일본에서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80·90년대 낡은 시스템..편의점 ATM이 빈 자리 메워
|
실제 일본의 금융인프라는 생각보다 낙후돼 있다. 일본 은행들은 여전히 ‘코볼(COBOL)’이라는 프로그램 언어를 쓴다. 우리나라에서 80·90년대에 주로 쓰던 프로그램 언어다. 한때 KB국민은행의 내분사태의 시발점이 됐던 시스템 교체 사업도 이 코볼 언어와 관련이 있다. 코볼은 안전성이 높지만 온라인이나 모바일 프로그램과의 호환성이 떨어지는 게 단점이다. 요즘 은행들은 대부분은 자바(Java) 등의 프로그램 언어를 사용한다.
일본 금융회사들이 여전히 낡은 시스템을 사용하는 이유는 일본 특유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터넷이나 모바일 금융에 대한 수요도 생각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7월 UBS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일본의 모바일 뱅킹 이용률은 17% 수준으로 전세계 평균(40%)을 크게 밑돈다. 중국의 모바일뱅킹 이용자는 60%가 넘고, 우리나라도 절반이 넘는다는 점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진다.
낙후된 일본의 금융시스템은 촘촘하게 깔아놓은 현금인출기(ATM) 인프라가 대체한다. 일본은 ‘편의점의 나라’라고 부를 만큼 골목마다 편의점이 포진해 있는데, 모든 편의점에는 현금인출기가 놓여 있다. 집 근처 편의점 현금인출기를 통해 일본인들은 현금을 인출하고 필요한 곳에 송금한다. 굳이 모바일 뱅킹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마이넘버 도입 계기로 시스템 바꾸겠다” 수요 폭발
|
마이넘버제도가 도입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아베 정부는 일본 국민 모두에 고유번호를 부여하고 각각의 번호를 모든 금융시스템에 연동시킬 계획이다. 개인 소득과 각종 세금 정보가 통합되고 일본의 국세청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일각에서 “아베 정부가 결국 세금을 더 걷으려고 마이넘버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마이넘버제도 도입을 계기로 “IT를 사회 변혁의 중심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특히 2020년 도쿄 올림픽 전까지 일본 IT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한다는 청사진까지 만들었다.
일본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대비가 불가피하다. 기술적으론 기존 시스템에 마이넘버 계정을 추가하면 되지만, 앞으로 전체적인 통합시스템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일본 정부는 2018년부터 모든 금융계좌를 마이넘버와 연동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못을 박아놓았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정보 유출 우려를 의식해 마이넘버를 유출한 개인과 기업에 최고 징역 4년형과 벌금 200만엔(약 2000만원)을 부과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지난 6월 일본 연금기구의 관리시스템이 해킹돼 125만명 이상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해 가뜩이나 불안감이 크다. 정보 보안 압력이 높아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금융회사와 기업들은 지금보다 강력한 보안시스템 마련이 불가피하다.
다이와증권은 마이넘버제도 도입으로 일본 IT시장에 3조엔(약 30조2200억원) 규모의 IT 특수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장 시스템 구축과 IC카드를 도입하는데 투자되는 금액만 2500억~3500억엔(약 2조5000억~3조5000억원)으로 추산했다. 선향 주일한국대사관 미래창조과학관은 “일본 IT 시스템 시장에서 조용한 가운데 거대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