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edaily 김기성기자] 러시아의 은행은 1300여개에 달한다. 겉으로 보기엔 상당한 숫자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 최대 은행인 스베르(SBER)뱅크 등 상위 30여개 남짓한 은행을 제외하곤 우리나라의 새마을금고 수준이다.
특히 지난 98년 모라토리엄 선언 당시 은행들의 줄도산으로 그야말로 `된서리`를 맞은 러시아 국민들이 생각하는 은행에 대한 신뢰도는 땅에 떨어져 있다. 또다시 돈을 떼일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은행에 돈을 맞기기를 꺼려하고 있다. 러시아 은행의 현주소다.
지난 98년 외환위기 발발로 모두 철수했던 국내 은행중에는 국책은행인 수출입은행(02.12)과 시중은행인 우리은행(03.5)이 사무소를 개설했을 뿐이다. 국내 은행들은 러시아의 성장가능성에 대해서는 이견을 달지 않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리스크가 크다며 본격적인 활동에는 회의적인 반응이다.
한편 오는 9월 노무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은 에너지, 우주과학, 시베리아 횡단철도-한반도종단철도 연결 등 한-러 경협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변혁기 맞은 러시아 은행..예금자보험법 올 하반기 시행 = 러시아 은행은 수치적으로 보면 분명 성장하고 있다. 작년말 기준 은행 자산은 1900억달러로 전년대비 35.1% 증가했고, 자본은 40.3% 늘어난 277억달러를 기록했다. 또 비금융부문에 대한 대출은 44% 증가해 810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상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은행시스템에 대한 국내외 신뢰도는 낮다. 국민들이 예금을 꺼리다 보니 국민들의 소득이 은행을 매개체로 산업부문에 투입되고, 산업부문의 발전이 국민의 일자치 창출과 가처분소득 증대, 그리고 내수 경기 촉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은행이 제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푸틴 대통령은 작년말 예금보험법을 제정했고, 올 하반기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예금 1만루블까지 지급을 보장하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이렇게 되면 최대 시중은행인 SBER뱅크에서만 보장받던 예금보호가 일정자격을 갖춘 은행들로 확대된다.
이를 통해 `국민들의 은행 신뢰 제고`와 `자격미달의 은행 구조조정`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구상. 이 과정에서 자격에 미달돼 예금보험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은행의 경우 인출사태가 발생, 부실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이 촉진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알렉산드 레프코프스키 프롬스비야즈(PROMSVYAZ) 은행장은 최근 모스크바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개최된 한국 금융권 출입기자단 세미나에서 "러시아 은행은 상위 20~30개사를 중심으로 합병 등 구조조정이 일어날 것"이라며 "하지만 합병과정에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급속한 방식보다는 점진적인 형태로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러한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적으로 바닥에 떨어진 러시아 은행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레프코프스키 은행장은 "은행 내부시스템 문제 때문에 해외 은행들이 본격적인 진출을 꺼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러시아 은행의 국제표준회계보고서(IIS) 채택, 리스크 관리체계 수립 정착단계, 중앙은행의 은행 법적시스템(규제) 강화 등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강조했다. 프롬스비야즈는 자산 15억달러 규모의 20위권 은행.
◇국내 은행 `현재는 탐색중` = 수출입은행과 우리은행이 현지 사무소를 개설했고, 몇몇 다른 은행들도 사무소 개소를 검토중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에 나설 때는 아직 아니라는 게 지배적인 반응. 일종의 탐색전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지난 91년 구 소련에 14.7억달러의 경협차관을 제공한 뒤 `홍역`을 치렀던 게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김진표 전 부총리와 쿠드린 러시아 부총리가 작년 9월 이자를 포함한 경협차관 22.4억달러중 연체이자 일부를 탕감한 15.8억달러에 대해 런던은행간금리(Libor)에 가산금리 0.5%를 얹어 2025년까지 23년간 상환받기로 합의하면서 가까스로 종결됐지만 말이다.
이후 국책은행인 수출입은행이 프롬스바야제 등 몇몇 러시아은행에 크레딧라인을 제공, 한-러 무역활성화에 기여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시중은행은 전무하다. 현재 사무소를 개설한 우리은행은 빠르면 하반기중 현지 법인을 설립, 내년 하반기께 채권투자 및 모기지론 영업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우리은행 정동식 모스크바사무소 소장은 "자동차를 제외하고 삼성 LG 등 국내 가전업체들도 복잡한 고비용구조의 세관절차 등을 꺼려 핀란드 등 북유럽 물류센터에 상품을 가져다 놓으면 러시아 딜러가 물품을 사오는 형태의 역외 무역을 하고 있을 정도로 무역거래조건이 열악한 상태"라며 "이런 상황에서 국내 시중은행이 러시아 현지에서 할일은 그리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레프코프스키 은행장은 "일본, 중국, 유럽은행들은 이미 많이 들어와 있지만 한국 은행과의 관계는 미약하다"며 "한국의 은행이 자본력이 약한 러시아은행에 크레딧라인을 보다 많이 제공해야 부품수입 등 교역이 늘어나고, 이것이 러시아기업과 은행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국 은행의 적극적인 참여를 주문했다.
◇노대통령 9월 방러..한-러 경협 기대감 고조 = 작년 한-러 교역규모는 41.8억달러로 IMF 이전인 97년(37억달러) 수준을 웃돌았다. 역외무역을 감안하면 6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동유럽지역본부를 모스크바로 최근 이전한 현대차의 점유율이 급상승중이고 최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내걸고 휴대폰 등 가전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삼성전자, LG전자의 점유율은 이미 50~60%에 달한다. 이밖에 페트병을 만드는 PET레진 등 석유화학, 라면 등 식품류, 직물 등도 주요 수출 품목이다. 반대로 세계 최대 자원보유국인 러시아로부터는 석탄, 석유, 우라늄 등 광물성 연료, 철강, 비철금속 등 3대 품목이 압도적인 비중으로 수입되고 있다.
한국기업의 러시아 현지 투자는 그동안 저조했지만 200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롯데그룹의 모스크바 복합건물 건설로 그나마 활기를 띠고 있다. 이 공사는 총 3억달러가 투입되는 것으로 호텔과 백화점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를 합치면 현재까지 202건, 총 6.6억달러 가량의 투자가 이뤄졌다. 또 LG상사는 23억달러를 투자해 타타르스탄 자치 공화국에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고, 삼성은 5억달러 규모의 정유설비 개발시설을 수주했다. 이밖에 대한항공이 오는 17일부터 상트페테르스부르크 직항로를 개설한다.
노대통령의 방러를 계기로 러시아와의 동반자적 협력이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노대통령은 우리나라 대통령으로는 5년만에 러시아를 방문한다. 정부는 ▲국내 최초 우주인 탄생 및 발사체개발 등 우주기술협력 ▲이츠쿠츠크 가스전 개발사업 참여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종단철도(TKR-TSR)연결 ▲수산물(명태) 조업 협력 등을 중점 논의할 예정이다.
김회정 주러시아 대사관 재경관은 "한-러는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해 나가야할 파트너"라며 "양국간 협력은 실질적인 차원에서 차분히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