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만발한 제주의 꽃과 400개가 넘는다는 오름과 섬 전역에 널린 골프장과 골프 치는 사람들. 그는 이렇게 제주의 흔한 풍광을, 자신이 입은 핑크색 셔츠처럼 밝고 화사한 색깔들로 따뜻하게 그린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현대적 풍속화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주에 와서 일 년 놀다 보니 가기가 싫었어요. 꽃 많지, 날씨 따뜻하지. 당시는 밥만 먹고 그림만 그리는 게 목표였어요. 그 이상 바랄 것도 없지만,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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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백을 쫓아 서귀포 중앙시장으로 갔다. "시장 구경을 돕겠다"며 하얏트리젠시제주 호텔 요리사이자 제주 토박이인 오동주씨가 우리를 따라나섰다. 이 화백은 "시장에 자주 온다"고 했다. 제주 꽃과 풀을 즐겨 그리는 이 화백은 제주 먹을거리에도 훤했다. "처음에 혼자 내려왔거든요. 애들 대학 갈 때까지 7~8년 혼자 살았어요. 그러니 혼자 해 먹어야죠. 지금도 마누라 바깥에 나가면 직접 해 먹어요. 밥하고 생선찌개, 돼지고기찌개 같은 거. 미역국 같은 것도. 미역에 굴만 넣으면 되거든요."
따뜻한 바람이 제주를 거쳐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꽃을 피우게 하고 있지만, 깊은 산골에서 주로 나는 나물이 나오기에는 아직 날씨가 차다. 서울 등 대도시 대형 마트나 시장에서 요즘 팔리는 나물은 주로 하우스 재배한 것들이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산과 들에서 나온 나물이 벌써 풍성하다. 이 화백은 "요즘 제주에서는 달래, 냉이, 쑥, 두릅 뭐 이런 것들이 많이 난다"고 했다. "씀바귀, 냉이, 고들빼기처럼 쌉쌀한 걸 좋아해요. 입맛 당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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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주 지역 오일장인 서귀포장(4·9일장)과 성산장(1·6일장)이 꽤 규모가 크고 나물을 팔러 나오는 할망(할머니의 제주 사투리)도 많다. 서귀포장은 서귀포시외버스터미널과 서귀포경찰서 사이 골목길에 선다. 터미널 쪽부터 옷전·꽃시장이 시작돼 골목 안쪽으로 채소전·곡물전·농기구전·약초전·잡화전이 열리고 가장 끝에 해물전과 가축전이 있다. 관광상품이 아닌, 시골 아낙이 직접 잡아 말린 옥돔을 구할 수도 있다.
오동주씨가 나물을 늘어놓고 팔던 한 할망 앞에서 멈췄다. "어, 벌써 고사리가 나오네?" "'초물(맏물의 제주 사투리)' 고사리예요. 한 닷새 전부터 나오기 시작했어요. 제주 한라산 고사리요."
제주에는 맛있는 게 여럿이다. 제주 고사리도 그 중 하나다. 그늘진 곳에서 자랐다는 고사리는 짙은 보라색으로, 줄기가 펜대처럼 통통했다. 눈으로 보기에도 맛있어 보인다. 이 화백은 "제주에는 여름철 본격적인 장마가 오기 전 4월에 '고사리장마'란 게 있다"고 했다. "안개가 낀 날이나 비 온 다음 날 좍좍 나오거든요. 고사리장마가 와야 고사리가 많이 나지. 고사리는 무덤에 제일 많더라고. 골프 치러 갔다가 가끔 따 오고 그래요. 지천이 고사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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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를 봉지에 담던 할망이 "무덤에 난 고사리를 어떻게 따느냐"고 발끈했다. 이 화백은 "아이고, 절이야 하고 따죠"라며 얼버무린다. 오동주씨는 "제주에서는 어르신, 조상을 모신다고 해서 무덤가 고사리는 따지 않는다"고 했다.
시장에는 고사리 말고도 여러 나물이 풍성하다. 오동주씨가 "이건 해쑥"이라며 집어 들었다. "제주 쑥은 짧고 굵어요. 하지만 맛과 향이 강해요. 해풍을 맞아서 그런가. 이렇게 잎 뒷면에 하얀 가루가 붙었죠. 제주 물건이 다 그렇죠. 볼품은 뭍것에 비해 덜하지만 맛은 좋죠. 이 쑥으로 만든 쑥떡은 제주 어디서나 맛볼 수 있지만, 뭍에선 이런 맛이 안 나요."
그에게 "음식이 쉽냐, 그림이 쉽냐"고 물었다. 그는 "음식이 훨씬 쉽다"고 했다. "미술은 애물단지예요. 밀도를 요하는 작업이죠. 옛날 내가 그린 그림 보면 짜증 나고 부끄럽죠. 음식은 먹어 버리면 되니까 깨끗하지." 그러더니 그는 덧붙였다. "서울에 있을 때는 어두운 그림도 그리고 추상도 하면서 '작가가 뭐냐' 고민도 하고 그랬어요. 화가로서 유명해지려는 마음도 있었죠. 지금은 '내가 행복하게 밥 먹고 살 수 있다면 예술가가 아니어도 좋다'예요. 예술이란 거 너무 강조하면 목이 뻣뻣해지는 것 같아요. 삶에 충실하면 된다. 제주에 와서 많이 배웠어요."
제주에서 평범한 일상을 사는 행복한 남자가 나물 봉지를 들고 시장을 총총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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