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에)지식인이여, 정신 차려라

  • 등록 2005-10-21 오후 3:28:06

    수정 2005-10-21 오후 3:58:15

[이데일리 문주용 경제부장] 최근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와 영국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는 `이 시대 지구촌 최고 지성인`을 선정했다. 자체 100명의 지성인 명단을 갖고 온라인 독자 2만여명을 장기간 설문조사한 결과다.

설문결과 세계 최고 지성인은 놈 촘스키가 꼽혔다. 그를 연상하면 지성인이라는 것은 항상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지난 60년대 베트남 전쟁때부터 이라크전까지 40여년동안 미국정부의 외교정책을 일관되게 비판해온 그의 전력 탓이다.

그렇지만 2위 아래로 내려가 보면 `반정부적`이라는 요인은 지성인의 기본요건이 아님을 알수 있다.

구조주의 언어학자이자 뛰어난 문학가인 움베르토 에코, 체코의 뛰어난 지성인이자 전직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우리에게 낯익은 폴 크루그먼도 끼어있다. 루쉬디, 교황 베네딕토16세, 폴 울포위츠도 있다.

세계 지성인들의 면면을 보면 다수가 반정부적이라기 보다는, 비판적 지식인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비판은 현실의 모순에 대한 탐구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활동이다. 여성이면서도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지성인, 환경론자들의 과장된 주장을 통계적으로 비판하는 지성인 들을 보면 그 어떤 거대한 `도그마`라도 날카로운 지성의 공격대상이 됨을 알 수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라는 명저로 우리에게 익숙한 E.H 카는 지성인에 대한 깊이있는 고뇌로 당대의 최고 지성인으로도 불리었다. 그의 책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들어 보고 있노라면 지식인에 대한 그의 지적은 가슴을 찌르는 듯하다.

"파괴와 쇠퇴 이외에 아무 것도 보지 않으면서, 진보에 대한 모든 신념과 인류에 의한 진보의 전망을 어리석은 짓이라며 배제해버리는 오늘날의 회의주의와 절망의 조류는 엘리트주의의 한 형태-위기에 의해 자신들의 안전과 자신들의 특권을 가장 현저하게 침식당해온 엘리트 사회집단의 산물(중략) 이라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의 주된 창도자들은 지식인들, 즉 자신들이 봉사하고 있는 그 사회의 지배집단의 이념을 전파하는 자들이다."

진보에 대한 회의주의적, 부정적 조류는 자신들의 특권을 침식당해온 엘리트 집단의 산물이라는 지적이다.

E. H. 카는 때문에 "사회의 중요한 전제들을 인정하고 거기에 기초해 행동하는 지식인들의 판에 박힌 주장이 아니라 그런 전제들에 도전하는 하는 지식인들이 있다"며 "나는 `저항적 지식인`으로서...오늘날 이 나라 지식인들의 지배적인 경향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위해, 이 나라 지식인들은 어떻게 길을 잘못 들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가 타계하기 직전인 82년에 썼던 `역사란 무엇인가`의 제2판 서문의 글이다.

지금 우리 지식인들이 처한 현실이 바로 이런 게 아닌가. 무너지는 특권에 침식당하고, 지배이념을 대변하고, 판에 박힌 주장을 일삼는 우리들의 학계 지식인, 또 언론계 지식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외국언론이 이 시대 세계 최고 지성인을 꼽을 때 우리의 지성은 색깔론과 정치공방에 의해 마비된 것 같았다. 지식인들은 옹기종기 모여 `6·25전쟁을 남침이다`라고 말한 강교수를 구속하라고 하고 이를 비호하는 노무현 정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지식인이라면 최소한 논리비약은 피해야한다. 강정구 교수의 주장은 이미 정치학계에서는 `마이너리티 중의 마이너리티 주장`으로, 90년대 논쟁이 끝난 이론이다. 정치학계가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데, 지식인들이 신문이 쓰는 대중적인 시각에 끌려 균형감을 잃고 있은 것이다.

불구속과 구속을 불처벌과 처벌로 치환시키는 것도 단순한 논리다.

이들의 지성을 마비시키는데는 이들만큼이나 `노무현을 싫어하는` 보수언론의 역할이 컸다. 거의 똑같은 논리로 돌아가면서 검찰의 정치적 독립, 국가정체성 문제를 부각시키며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

물론 진보주의자들도 잘못했다. 실언, 실수들라고도 할 수 있고, 형편없는 논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정권내에 성과를 빨리 내야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무리하게 사회를 흔들고 있을지 모른다. 어찌보면 진지함이 결여된 면도 없지 않아 사회에 대한 책임감 부족이라는 인상도 든다.

그렇지만 이 시대 지식인들은 이념에 맹종하지 않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 현재 정치공방에 의연`할 순 없는가. 그래서 진보와 보수가 차분히, 통합적으로 사회적 의제가 진행될 수 있게끔 길라잡이를 할순 없는가.

세계 지성인들이 비판한 현실은, 독재, 여성차별, 전쟁 등 누구나 다 아는 거대담론에 대한 것이 아니다. 독재 반대이면 어떤 민주인지, 여성차별반대이면 어떤 평등인지, 전쟁 반대이면 어떤 갈등 해결인지 구체적으로, 진지하게 따져묻는다. 그 진지함과 치열함, 날카로움으로 지성인의 평가를 받았다.

우리 지식인들에게 `인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누려서는 안되는, 빨갱이한테는 내줄수 없는,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사람에는 베풀어선 안되는, 그런 인권이란 말인가.

북한 인권상황에 대해서는 열렬히 성토하고, 이를 지적하지 못하는 우리 정부에도 큰 목소리로 비난하면서도 정작 남한에서는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자에게 인권이 웬말이냐고 생각한다면 지식인다운 균형감이라 할 수 있을까.

국가권력에 의해 그토록 상처입었던, 우리의 그 많은 시민 권리가 21세기 문턱을 넘어선 지금도, 색깔론에 의해서 왜곡되고 유보되어야 하는지 묻고싶다.

한국의 지성이 빨리 마비상태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정치에 독립되어서는 안되지만 정치공방에는 의연해져서 정치사회의 올바른 길라잡이가 됐으면 한다. 언론지식인과 학계 지식인들이 체제전환기의 기회주의적 숙명을 스스로 깨고, 의연한 자리를 새로 찾았으면 좋겠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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