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세계의 모든 비즈니스들은 대개 룰과 관행에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간다. 치열한 정보전쟁과 물밑교섭은 있을지언정 막무가내식 돌발행동이나 국수주의적 주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자원개발 비즈니스'로 접어들면 이같은 상식과 선입견은 모두 무너진다. 기업의 대표이사들이 직접 서명한 계약서가 잉크도 마르기 전에 휴지조각이 되는 경우는 다반사다.
유전개발을 놓고 가끔은 정규군 탱크가 동원되기도 한다. '비즈니스'라는 탈만 쓰고 있을 뿐 실제로는 전쟁이다. 때로는 쌀이나 밀보다 더 중요한 에너지를 놓고 싸우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총성없는 3차대전..에너지 전쟁
자원개발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대기업의 한 임원은 "실제 현장을 들여다보면 이미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자원개발에 투자하려면 종잡을 수 없는 국제유가와 함께 더 갈피를 잡기 어려운 현지의 정치적 상황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모른체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 전쟁이 '에너지 전쟁'이라면 모른체 하는 순간 우리가 쓸 석유는 구할 길이 없다.
총성없는 전투가 벌어지는 에너지 전쟁터에 우리는 정부군인 석유공사, 가스공사와 함께 SK(003600) LG상사(001120) 대우인터내셔널(047050) 현대상사(011760)같은 민간기업들을 '파병'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3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석유와 천연가스 등 베네수엘라의 모든 천연자원을 국유화하겠다고 갑자기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달 뒤 한국석유공사가 지분 14%를 갖고 있던 베네수엘라의 오나도 광구의 권리 가운데 60%가 베네수엘라 정부 소유로 넘어갔다. 결국 석유공사 지분은 5.64%로 줄었다.
석유공사는 이 광구에 3500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2100만달러 정도만 회수한 상황. 그러나 사업을 포기하던가 아니면 지분 감소를 받아들이던가 둘 중 하나를 요구한 베네수엘라 정부의 우격다짐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정권이 바뀌거나 상황이 변하면 계약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 유전개발 도중에도 세금이나 로열티를 올려받겠다고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해 9월 러시아 정부가 수십억달러 규모의 해상 가스전 사업인 사할린2 프로젝트의 환경면허를 정지시킨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우리 땅에서 가스를 캐지 말라고 하면 캐지 말아야 하는게 이 바닥의 '룰'이다.
볼리비아는 지난 5월 천연가스 사업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가스전에 군대를 파견했다. 가스전에 투자한 외국계 회사들에게 국유화에 협조할 것인지 국외로 떠날 것인지를 선택하라면서 압력을 행사했다. '비즈니스'에 몰두하고 있던 오일맨들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탱크와 군인들을 보고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선진국에서만 에너지를 캐기는 어렵다.
돈이 될만한 유전과 가스전들은 대부분 후진국의 심해나 오지, 밀림 속에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들, 80년대 중동으로 몰려간 건설노동자들이 흘렸던 피땀을 21세기에는 해외자원개발에 나선 기업인들이 흘리고 있는 셈이다.
SK(003600)(주)는 해외 투자 유전에서 실제로 매일 2만배럴의 원유를 뽑아 올리는 유일한 민간기업이다. 2만배럴이면 우리나라의 하루 필요 석유량의 1%도 안되는 금액이지만 우리나라가 투자한 해외유전에서 생산하는 원유(하루 11만5천배럴)의 20%에 가까운 수치다.
SK는 하루 2만배럴씩 생산되는 자체 개발 원유를 시장에 팔아 지난해 2000억원 가량을 벌어들였다. SK(주) 연간 영업이익의 15% 정도다.
올해 하반기 이후에는 브라질의 BMC 광구와 예멘의 LNG 광구, 페루의 LNG 광구에서 생산을 시작하기 때문에 2009년 말에는 현재의 3배가 넘는 하루에 7만배럴 가량을 생산하게 될 예정이다.
GS칼텍스도 지주회사인 ㈜GS홀딩스와 함께 해외유전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GS칼텍스는 유전개발사업을 통해 하루 정제능력인 72만 2500배럴의 10~15%까지 자체 조달한다는 계획. 지난해 8월에는 태국 육상의 탐사광구 두 곳의 지분 30%를 일본 회사로부터 사들였는데 탐사를 시작한지 석달여만에 대형 유전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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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상사는 현재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4개의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이 가운데 3개 유전의 매장량은 모두 2억 배럴 전후로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둘 경우, 유전별로 연간 200억원의 이익이 20여년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대우인터내셔널도 미얀마에서 이미 가스전 개발에 성공했다. 가스 판매처를 확보하고 나면 매년 수천억원의 배당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대종합상사 역시 워크아웃이 진행되는 악조건 속에서도 꾸준히 해외 자원개발에 나서고 있다.
◇기업이 뛰고 정부가 돕는다..자원외교도 활발
'에너지 비즈니스'가 보통 비즈니스와 다른 것은 정부가 팔을 걷어부치고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비즈니스라는 점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정부의 지원이 '반칙'또는 '특혜'로 인식되지만 여기서만은 예외다.
중국도 국영은행에서 지원한 자금으로 국영석유회사가 해외 유전을 사들이는 공격적인 방식을 펼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이 유전을 사들이는 걸 지켜보면 마치 미사일이나 전투기를 사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가격을 불문하고 필요하면 무조건 사겠다는 의지가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도 적극적인 자원외교를 통해 기업들의 해외자원개발을 돕고 있다. 대통령이 순방하고 나면 산자부가 길을 뚫고 우리 기업들이 투입되는 방식이다.
산자부는 이미 기업들을 중심으로 '에너지산업 해외진출협의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여기에 가입한 기업은 한국석유공사, 한국전력, 가스공사, 광업진흥공사, 지역난방공사 등 에너지공기업 5개와 SK, 대우인터내셔널, 삼성물산, GS칼텍스, 포스코, 고려아연, 삼탄 등 24개 기업에 달한다. 올해 들어서만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도로공사, 한화, 삼천리도시가스, 수출입은행이 새로 가입해 해외진출에 팔을 걷어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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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자원개발에 투입되는 자금도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산자부가 35개 해외자원개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해외자원개발 분야에 투자하기로 한 자금은 전년대비 81.2% 늘어난 37억8000만달러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에는 자원보유국에 도로나 전력 등 사회 인프라를 깔아주고 원유개발권을 따오는 물물교환식 패키지딜'이 늘어나고 있다"며 "에너지 확보를 위해 정부와 한국의 주력기업들이 사실상 올인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