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2주일 뒤. 아이스너 회장의 퇴진 여운이 채 가라 앉기도 전에 아이거 사장은 디즈니의 전략기획 그룹을 해체해버렸다. `전제군주`로 불리던 아이스너 회장의 수족노릇을 해온 친위 조직을 전격 해체함으로써 `아이스너 체제의 종언`을 고하는 신호탄을 올린 것이다.
지난 5개월 간 아이거 사장은 `아이스너 시대의 유산`을 일소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 때 반대파에서 아이거에게 쏟아지던 `아이스너의 후계자`라는 비판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아이스너 회장 밑에서 ABC그룹 회장과 월트디즈니 인터내셔널 사장을 역임하며 경영수업을 받은 아이거의 `디즈니 부흥계획`은 아이로니컬 하게도 아이스너의 실책을 만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아이스너 회장은 1984년 디즈니에 영입된 뒤 디즈니 파크를 해외에 개장하고, ABC와 미라맥스 등을 인수하는 등 적극적인 사업확장을 통해서 디즈니를 오늘날의 세계적인 복합 미디어 그룹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하지만 그의 독선적인 성격과 경영스타일 때문에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스너는 월트 디즈니의 조카인 로이 디즈니를 비롯한 창업자 집안과의 갈등, 제휴사인 픽사, 미라맥스 등과의 결별로 인해 근래에 디즈니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그가 내쫓은 제프리 카젠버그가 드림웍스로 건너가 `슈렉`으로 대히트를 친 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업부는 몇 년간 이렇다 할 히트작을 내지 못한 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첫 방문은 "직접 유대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아이거의 설명대로 별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거는 5월에 픽사를 다시 방문했고 그 뒤로 디즈니에 대한 잡스의 비난 발언이 크게 수그러졌다. 잡스는 심지어 픽사의 실적 발표회 자리에서 아이거를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디즈니와 픽사 간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우호적인 대화가 시작됐다는 점에서 주변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아이거가 안고 있더 또 다른 문제는 디즈니 일가다. 전직 디즈니 이사였던 로이는 역시 이사회 멤버였던 스탠리 골드와 함께 아이스너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지난해에는 주주들을 끌어 모아 반기를 들기도 했다. 아이스너의 퇴진에는 로이를 비롯한 창업주 가문의 반발이 한몫을 했다. 이 때문에 디즈니 일가도 수백만 달러 이상을 써야 했지만, 디즈니 역시 경영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다.
아이거는 5월 6일 로이를 처음 만났지만 대화에는 별 성과가 없었고, 로이와 골드는 바로 그 다음주에 델라웨어 캔서리 법원에 소송을 접수했다. 최근의 디즈니 이사회 표결이 무효이며, 이사회가 아이거를 CEO로 선임하면서 충분한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아이거는 로이를 다시 만났고, 몇 주에 걸친 협상 끝에 7월 11일 양측은 휴전을 선언했다. 디즈니의 홀대에 서운함을 갖고 있던 로이에게는 표결권이 없는 명예 이사직과 상담역의 타이틀이 부여됐고, 로이는 소송을 취하했다.
지난 몇달간 아이거는 중국과 인도 베트남 홍콩 등 아시아를 수차례 방문했다. 디즈니에게 가장 중요한 시장으로 여겨지는 아시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거는 "아시아 전체를 디즈니의 중요한 성장 기회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거는 또 드림웍스에 밀리고 있는 애니메이션 사업에서 디즈니의 명성을 되찾아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다. 디즈니는 올 가을 `치킨 리틀`을 개봉한다. 이 작품은 새로운 컴퓨터 애니매이션 사업부의 능력을 평가하는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전략기획 그룹을 해체하고 영화와 애니매이션 등 각 사업부에 자율권을 허용한 아이거의 경영방식이 어떤 성과를 낼지 주못된다.
아이거는 "그동안 중요한 문제들이 해결됨에 따라 이제 내부문제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 내부 사업에 역점을 두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한편 물러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스너 역시 아이거에게 힘을 실어주며 디즈니 부활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아이스너는 "나는 밥(로버트의 애칭)이 잘 적응해 빨리 회사를 운영하기를 바란다"며 "쓸데 없는 장애물들이 제거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아이스너가 떠난 뒤 아이거의 디즈니는 어떤 변모를 보일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