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국력`이라면 `에너지는 경제를 움직이는 심장`이다. 에너지 확보를 위한 전쟁에서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의 처지는 `맨주먹 붉은 피로` 적을 막아내야 하는 형국이다. 거대 자본이 충돌하고 각국의 외교력이 총동원 되고 있는 세계 에너지 전쟁의 현황과 이 싸움에서 한국의 돌파구를 찾는 첨병 노릇을 하는 우리 기업의 활약상을 시리즈로 살펴 본다.
지난 3월말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석유와 천연가스 등 베네수엘라의 모든 천연자원을 국유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달 뒤 한국석유공사가 지분 14%를 갖고 있던 베네수엘라의 오나도 광구의 권리 가운데 60%가 베네수엘라 정부 소유로 넘어갔다. 결국 석유공사 지분은 5.64%로 줄었다.
석유공사는 이 광구에 3500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2100만달러 정도만 회수한 상황. 그러나 사업을 포기하던가 아니면 지분 감소를 받아들이던가 둘 중 하나를 요구한 베네수엘라 정부의 우격다짐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석유공사 관계자는 "베네수엘라 정부 측이 지분 감소 댓가로 추가 탐사광구의 지분을 주기로 했지만 아직 소식이 없다"며 "해외자원개발 사업은 사업이라기 보다는 전쟁을 치르는 기분일때도 많다"고 말했다.
에너지 자원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고 원유가격이 폭등하면서 자원보유국가의 배짱 튕기기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정권이 바뀌거나 상황이 변하면 계약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 유전개발 도중에도 세금이나 로열티를 올려받겠다고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싫으면 석유 캐지 말고 나가라'는 태도지만 아쉬운 쪽이 굽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배째라 식' 우격다짐의 피해자들의 면면을 보면 내로라하는 메이저 석유회사부터 일본 같은 경제강국까지 포함되어 있다.
지난 9월 러시아 정부가 수십억달러 규모의 해상 가스전 사업인 사할린2 프로젝트의 환경면허를 정지시킨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석유공사의 한 관계자는 "사할린2 프로젝트가 러시아의 주요 프로젝트 가운데 러시아 회사의 지분보유가 하나도 없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러시아 정부가 생산물 분배계약에 불만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본과 네덜란드 회사는 사업 지분의 50%를 러시아 회사에 넘기기로 하고 협상을 진행중이다. 일본 정부는 사할린 2공구가 개발되면 일본의 연간 천연가스 수요의 20%인 1000만톤을 수입할 계획이었지만 러시아 측의 시비걸기로 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 각국의 에너지 개발 계약조건 중도 변경사례 | |
◇ 산유국들 '배째라'..경제강국 일본도 연전연패
해외 유전에 투자하고 개발에 성공할 경우 결과물을 팔아 수익을 얻는 유전개발투자는 단순한 비즈니스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간의 알력과 예민한 외교문제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일본이 이란의 '아데나간'이라는 초대형 유전에 투자했다가 쓴맛을 본 사례는 석유가 나지 않는 나라가 해외에서 석유를 개발해 들여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일본이 이란에 석유개발을 위해 투자한 자금이 핵개발에 전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가 나섰고 설상가상으로 석유탐사와 개발에 필요한 비용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사업이 지지부진해졌다. 그러자 칼자루를 쥔 이란 정부는 일본에 대해 원유 개발 프로젝트의 취소를 통보했다.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 이란은 그 유전을 다른 회사에 팔면 그만이기 때문.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은 애초부터 이란 유전에 일본이 투자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으나 일본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으로 미국이 묵인하면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라며 "북한과 이란이 핵개발을 시작하면서 일본이 북한의 핵개발 등에 대해서는 제재를 주장하면서 이란에 대해서는 핵개발과 무관하게 유전투자를 계속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볼리비아는 지난 5월 천연가스 사업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가스전에 군대를 파견했다. 가스전에 투자한 외국계 회사들에게 국유화에 협조할 것인지 국외로 떠날 것인지를 선택하라면서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다른 나라들은 이 사건을 '볼리비아 쇼크'로 부르며 신문에 보도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 유전 사들이기 열풍..에너지 안보가 첫째, 돈 문제는 둘째
산유국들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석유가 필요한 나라들은 몸이 달았다. 지난 8월 M&A시장에 매물로 나온 '페트로카자흐스탄'이 좋은 사례다. 이 회사는 최근 카스피해의 유전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카자흐스탄에 가채매장량 5.5억배럴의 대형 유전을 갖고 있는 회사.
시장에서는 20억불 정도에서 낙찰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인도의 국영 석유회사인 ONGC는 무려 31억달러를 써냈다. 늘어나는 인도의 석유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유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트로카자흐스탄은 무려 41억8000만달러를 써낸 중국의 국영 석유회사로 팔렸다. 세계 유전 거래사상 최대 금액이었다. 전세계의 석유전문가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가격이라는 반응이었지만 중국은 한달 뒤 에콰도르의 엔카나 유전도 시장에서 평가하는 가치의 3배가 넘는 14억2000만달러를 주고 사갔다.
중국 국영석유회사는 올해 카자흐스탄의 카라잔바스 유전도 20억달러에 사들였다. 이 유전은 3년전 한국의 석유공사가 한때 매입을 검토했지만 당시 8억불이나 되는 비싼 가격때문에 망설이다 포기한 유전이다. 중국의 이런 공격적인 움직임에 다급해진 인도와 다른 나라들의 입찰가격도 덩달아 높아지면서 석유를 생산하고 있는 생산유전의 거래 가격은 2004년보다 5배 가량 올랐다.
중국의 이같은 독특한 전략의 배경에는 에너지가 상품이 아니라 전략물자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자국의 석유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석유시장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판단이다. 언제든지 미국이나 일본, 러시아와의 정치적 군사적 분쟁으로 원유 수송로가 막힐 수 있다는 점이 중국을 다급하게 만들고 있다. 중국 국영 석유사의 공격적인 움직임 뒤에는 언제든지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중국 정부소유의 은행들이 있다.
◇ 석유수입 3위 한국..에너지 독립 이제 걸음마
미국·중국·일본 등 거대한 에너지 소비국들과 자원민족주의로 무장해가는 산유국들의 틈바구니속에서 원유수입규모 세계 3위인 우리나라의 입지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 세계 각국의 에너시 수입액과 소비규모 | |
일본해군은 이지스함을 4척이나 보유하는 등 자국의 수송선을 호위할 수 있는 상당한 원양작전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대북방어를 위주로 편성된 한국해군은 그렇지 않다. 한국에 수입되는 석유의 기나긴 해상수송로의 안전은 전적으로 미국 해군에 의존하고 있다.
SK(주) 등 정유사와 LG상사 등 종합상사들이 뒤늦게 해외 유전개발에 뛰어들어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여전히 자금과 인력, 규모, 기술 모든 면에서 열세다.
특히 원유·가스의 자급률은 한국의 경우 4%로 프랑스 93%, 이탈리아 50%, 스페인 56%에 비해 매우 취약하다.
박희천 인하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에너지의 97%를 수입에 의존하면서도 에너지를 다른 재화와 마찬가지로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을 수입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국제질서하에서 무임승차하며 별다른 노력 없이 에너지를 공급받아 왔지만 이러한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밝혔다.
▲ 우리나라 석유수입액 추이(단위 : 백만달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