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소현의 일상탈출)(21)正과 不正

  • 등록 2006-12-15 오후 3:38:48

    수정 2006-12-15 오후 4:28:56

[이데일리 권소현기자] 바라나시에서 델리로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플랫폼에 대충 자리를 잡고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을 내려놓았다. 하루종일 더위에 지친데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졸음이 밀려온다. 델리행 기차는 00시20분 출발 예정이었지만 들어오지는 않고 계속 연착한다는 방송만 나온다.

여기저기 천을 깔고 앉아있는 인도인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인도의 어느 역에 가나 역 대합실부터 플랫폼까지 자리만 있으면 천 조가리 하나 깔고 자기집 안방인냥 드러눕는 인도인들 투성이다.

▲ 바라나시역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인도인들
바닥이 지저분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천 없이 맨 바닥에 그냥 벌러덩 드러눕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누워서 잠을 청하기도 하고 뭘 먹기도 한다. 기차를 기다리는 이들 방식이다.

가방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보니 다리가 저린다. 다시 일어서서 한참을 서있으려니 이번엔 다리가 아프다. 그래서 앉았다가 섰다가를 반복했더니 옆에 천을 깔고 앉아있던 할머니가 자리를 조금 비켜주며 앉으란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다. 단번에 `땡큐`를 외치며 앉았다.

플랫폼에는 계속 싸구려 음식과 음료수를 파는 이들이 왔다갔다 한다. 옆에 있던 할머니가 '짜이~ 꼬피(커피)~'를 외치는 짜이왈라(짜이를 파는 사람)를 불러 짜이를 한잔 시켰다.

짜이는 홍차에 우유를 넣고 끓인 것으로 인도인들이 즐겨 마신다. 한잔에 4루피니 80원 정도다. 짜이왈라는 바구니에 가득 쌓아놓은 질그릇을 꺼내 보온병에서 짜이를 따라 주고는 기다린다.

짜이를 홀짝 홀짝 다 마신 할머니, 갑자기 질그릇을 기차 선로에 휙 내던진다. 질그릇이 깨지는 그 쨍그랑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할머니가 화났나' 하고 슬쩍 곁눈질로 봤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부채질을 한다. 짜이왈라(짜이를 파는 사람)는 다시 '짜이~꼬피~`를 외치며 새로운 손님을 찾아 떠난다.
▲ 짜이 담아주는 질그릇

질그릇을 수거해가려고 기다리는 모양이구나 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 뒤로는 기차역에서 짜이왈라를 만날때마다 짜이를 사먹었다. 짜이보다도 질그릇 한번 던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질그릇을 선로에 휙 내던져 깨뜨릴때의 그 통쾌함이란..

인도인들은 쓰레기를 길거리에 아무렇게 버린다. 기차 선로에도 쓰레기가 가득하다. 질그릇을 던지는 것도 처음에는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는 행동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인도에서 질그릇을 깨버리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됐다. 바로 '정과 부정'의 의미다. 힌두교에서 정은 단순히 깨끗하다는 의미와도 좀 다르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상태를 말한다.

인도인들은 인간의 육체가 정과 부정 상태를 계속 오간다고 여긴다. 목욕을 막 마쳤을때가 가장 정한 상태다. 반면 분비물과 배설물은 부정한 것이다. 화장실에서 휴지를 쓰지 않고 손을 이용해 물로 닦아내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물로 깨끗하게 씻어내야 부정의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도저히 적응이 안 될것만 같았던 인도의 화장실 문화도 결국 정과 부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이른 아침 창 밖으로 넓은 들판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인도인들이 종종 눈에 띈다.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아침에 볼일을 보러 들판으로 나오는 것이다.

작은 들통 하나씩 들고 밖으로 나와 가릴 것도 없는 탁 트인 공간에서 아무렇지 않게 볼일을 본다. 그리고는 들통에 담긴 물로 씻어낸다. 이 로따(lota)라고 불리는 놋쇠로 만든 물그릇은 인도인들의 필수품이다.

이때 쓰는 손은 항상 왼손이어야 한다. 왼손은 부정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음식을 먹을때나 악수를 할때에는 항상 정(正)한 오른손을 사용한다.

▲ 인도의 화려한 전통의상 사리
인도의 전통의상인 사리와 도띠도 같은 개념이다. 바느질 한 옷은 부정한 옷이고, 바느질은 하지 않은 옷은 정한 옷이다. 사리나 도띠는 재단하고 바느질을 해서 만든 의상이 아니라 하나의 천이다.

부정의 위협은 항상 존재한다. 컵이나 접시와 같이 접촉을 통해 부정해질 수 있는 물건은 쉽게 폐기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다. 바나나 잎으로 만든 접시와 진흙으로 만든 찻잔이 있는 이유다.

인도에 대한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성공한 유명한 정치가에 대한 얘기다.

그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후 고향을 찾았다. 한때 천민이라고 멸시하고 상대하지 않았던 고향인들은 당연히 그를 반겼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이다. 어느 모임에선가 멋진 식사를 하고 돌아가려고 하자 한 천민이 뒷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제는 뒷걸음을 치지 않아도 된다네. 한때 불가촉천민이었던 나도 이렇게 성공하지 않았는가"하며 격려했다.

그러자 그 천민은 "저는 그냥 접시를 가지러 왔어요. 사람들이 당신 점심을 차리기 위해 제 접시를 빌려갔거든요"고 답했다.

특히 흙으로 만든 질그릇은 매우 쉽게 오염되는 것으로 간주해 자신보다 낮은 카스트가 만져서는 절대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 그릇을 반드시 깨뜨려버린다. 처음에 재미로 휙휙 던졌던 질그릇은 반드시 던져서 깨뜨려야 하는 부정한 물건이었던 것이었다.

늘 '正'한 상태를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서 왠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혹서기에 인도를 찾은 탓에 늘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고 가끔 몇 일을 못 씻어 초췌한 몰골로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음만 '正'이면 된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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