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었던 그날의 돈 이야기

시장의 기억 : 한국의 자본시장은 어떻게 반복되는가
이태호|392쪽|어바웃어북
  • 등록 2020-04-17 오전 9:32:36

    수정 2020-04-17 오전 9:32:59

△1962년 7월 증권파동과 화폐개혁 직후 재개장한 서울 명동 증권거래소 주변에 모여든 투자자들. 사진=한국거래소, 어바웃어북 제공
[이데일리 김재은 기자] 그날 밤, 우리 부모님은 어떤 돈 이야기를 나눴을까.

한국 경제의 성장사는 수많은 드라마로 가득하다. 그 시절 주식쟁이들을 ‘비트코인’처럼 빨아들였던 ‘대증주’(증권거래소 주식)부터 한 세대를 통째로 환희와 눈물에 빠뜨린 ‘건설주’, ‘닷컴버블’, ‘외환위기’까지. 고도성장 국가의 주식과 채권시장이 일으킨 파동은 저마다 격정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자본시장에서 벌어졌던 대형 이슈의 전말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다. 과거에서 배우라 말하는 많은 경제서적도 온전한 스토리텔링엔 인색하다. 그저 ‘대우사태’ 땐 이랬고, ‘글로벌 금융위기’ 땐 저랬다는 식이다.

선배들의 구전에 의존하다고니 ‘라떼 이즈 홀스(나 때는 말이야)’란 유행어처럼 공감하기 힘든 옛날이야기 취급을 받기도 한다. 오늘날 시장을 해석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가치를 생각하면 안타깝다.

저자는 자본시장 전문 기자의 눈으로 그날의 돈 이야기를 생생하게 되살린다. 일제 강점기부터 100년에 걸쳐 벌어진 33개의 사건을 발단부터 파급효과까지 소설처럼 흥미롭게 재구성했다.

소나기가 창문을 내리치던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대통령 긴급명령’, 분노에 찬 건설주 투자자들의 거래소 난입, 눈물바다였던 은행산업의 구조조정 등 강렬한 장면을 100여장의 사진을 곁들여 현장감 있게 그렸다. 쉬운 설명과 놀랄 만큼 풍부한 주석은 각각의 사건을 둘러싼 독자들의 호기심을 해소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주식시장에 치우친 기존의 자본시장 역사서와 비교해 풍부한 채권 및 외환시장 이야기는 이 책의 큰 강점이다. 과거 채권·외환 전문기자가 드물었던 신문이 미처 다루지 못했던 숨은 사건들을 발굴해 거대한 스토리의 퍼즐을 꼼꼼하게 완성했다.

‘단계적 금리 자유화’와 전설로만 남은 ‘3투신’의 멸종 등 다수는 이런 집요한 추적의 창조물로, 좀처럼 책을 내려놓기 어렵게 한다. 채권시가평가 등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내용도 소설 일부를 인용하거나 비유를 통해 친절하게 전달하려 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호황이 침체로 넘어가는 현상을 반복적으로 다룸으로써 통찰을 선사하기도 한다. 역사상 최고였던 1980년대 중반의 ‘3저 호황’뒤에 찾아왔던 깊은 침체의 골, 사상 최대 이익을 올리던 한국 조선과 해운산업이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과정을 객관적인 통계에 기초해 날카롭게 분석했다.

이런 자본시장 역사의 기록은 코로나19 사태에서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최근 여행과 항공업계, 증권사, 대형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산업에 덮친 현금 유동성 위기는 ‘예측 가능한 위기는 없다’는 교훈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최고의 호황을 만끽하던 지난 수년간, 어쩌면 이들은 ‘시장의 기억’을 망각하고 경고의 목소리에 귀를 닫았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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