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⑧김윤모 하나증권 기업본부장(상)

  • 등록 2001-04-27 오후 2:38:19

    수정 2001-04-27 오후 2:38:19

[edaily] 채권 펀드매니저와 브로커는 미우나 고우나 얼굴을 맞대고, 전화로 숨소리를 함께 해야하는 관계다. 펀드매니저를 야구의 투수에 비유한다면 브로커는 포수다. 포수의 리드가 좋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투수도 빛을 볼 수 없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를 이끌고 있는 김윤모 이사다.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는 회사채, ABS 등 발행업무와 채권중개 분야에서 1년 반만에 업계 수위를 차지, 급부상한 브로커 하우스다. 김 이사는 하나은행에서 잘 나가는 ‘뱅커’였지만 과감하게 브로커로 변신, 여의도에 안착한 대표적인 ‘명동맨’이다. 은행원에서 증권사 직원으로, 그것도 폐쇄적이라는 채권판의 브로커로 변신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은행시절 신탁부에 오래 있어서 채권시장에 지인이 많고 전혀 낯설지는 않았어요. 제가 채권딜러였을 때 브로커로서 저를 응대했던 분들중 딜러가 되신 분들도 많구요. 지금은 제가 브로커고 그분들이 딜러죠. 입장이 바뀌었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시장에서 인정을 받으면 되죠.” 김 이사는 은행시절에도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새로운 채권에 투자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하나은행의 해외DR 발행실무를 맡았을 때는 가격 협상의 기법을 익히기 위해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증권사를 이잡듯 뒤지고 다녔다. 자산유동화법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신탁적 양도”라는 방법으로 매출채권을 유동화시키는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하나증권 브로커팀을 이끌면서도 신용도가 높고 성장성도 있지만 시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회사채, 카드채 등을 발굴해 손수 기업IR까지 해가며 채권발행을 성공시켰다. 김 이사는 “단순히 호가나 불러주고 딜러들 의견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브로커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며 “브로커일수록 공부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해 내야한다”고 말했다. “투수에서 포수로, 딜러에서 브로커로” 김 이사의 변신 과정, ‘명동맨’의 ‘여의도 이주기’를 들어봤다.(김 이사 약력은 인터뷰 하편 기사 하단참조) -통계학을 전공하셨네요. ▲고려대학교 통계학과 79학번으로 입학했습니다. 통계학이란 학문이 너무 어려워서 대학시절에는 딴전을 많이 피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의사를 하면 훨씬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건강에 관심이 매우 많은 편입니다. 한약이나 한방체질에도 남다른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집안에 의사가 계신가요. ▲가족 중에는 없습니다. 저희는 집안은 교육자 집안입니다. 조부때부터 3대째 교육자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친께서는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을 하셨죠. 한때 세칭 부산에서 제일 잘나가는 과외선생님이시기도 했습니다. 하하. 현재 형님 중 한 분도 교직에 계십니다. -그럼 어떤 기회에 건강, 의학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겁니까. ▲그건 아마 타고난 것 같습니다. 아주 어릴적부터 흥미를 가졌으니까요. <비즈니스 맨의 꿈이 뱅커로> -대학교 시절의 꿈은 뭐였습니까. ▲상대쪽을 다니다보니 자연스레 비즈니스 맨의 꿈을 키웠습니다. 실제로 대학졸업 후 처음에는 모 그룹사 공채에 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것이 꼭 생각한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더군요. 제가 형님이 세 분인데 대한항공에서 근무하시는 형님께서 “그룹일이라는 것은 너무 힘들고 비전도 별로 없다. 금융계로 진출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셨어요. 그래서 군대가기 전에 조흥은행에 입사했습니다. -그 때가 언제였나요. ▲83년이었습니다. 지금 서울역 엘지빌딩에 있었죠. 그당시 은행은 무척 경직되고 위계질서가 엄격한 분위기였습니다. 처음 입행해서는 외환 네고업무를 담당했습니다. 한번은 다른 그룹사 직원과 우리 여직원사이에 싸움이 붙었어요. 대기업의 위세가 대단하던 때니까 그 그룹쪽에서 강력한 반발을 하고 저희 직원들은 큰 야단을 듣고…난리도 아니었죠. 그런데 사실 우리 여직원들은 순서에 맞게 일을 처리했을 뿐이었거든요. 그래서 차장에게 항의를 했죠. “여직원들은 사실 잘못한 것이 없다” 고 말입니다. 그 일로 차장과 크게 말다툼을 벌였는데 그때 ‘은행 일은 내 적성에 맞지 않다. 다른 직장을 찾아봐야겠다’ 는 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와서 새 직장을 구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IBM같은 외국기업들이 매우 인기가 높은 직장이었어요. 그래서 Bank of America와 국내 기업이 합작해서 만든 한미은행이 괜찮겠다 싶더군요. 외국계 기업의 문화를 지니고 있는데다 급여수준도 상당히 높았고… 바로 추천을 받아서 어플라이를 했습니다. 다섯명을 뽑는데 경쟁률이 몇십대 일일 정도로 무척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때 저희 담당임원이 김진만 전 한빛은행장이셨죠. 지금은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86년 당시 은행권에서 그렇게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닌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자유복을 입고 회사 안에서 머그컵을 들고 돌아다니고 외국TV에서 본 것처럼 책상에 걸터앉아 회의도 하고… 이 모든 것이 당시로선 파격이었던거죠. 사실 조흥은행에서는 채 1년도 안되는 기간을 근무했기 때문에 첫 직장은 한미은행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미은행에서의 생활은 ▲그때 김진만 행장께서 상무로 재직중이셨는데 저를 좋게 봐주시고 많은 배려를 해주셨어요. 특진도 세 번 정도 했습니다. 입사때부터 기업금융 쪽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럼 어떤 계기로 한국투자금융 전환설립사무국으로 이직하게 되었습니까. ▲ 한국투자금융은 하나은행의 전신입니다. 처음에 제의를 받고 무척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한미은행에서의 생활도 괜찮았고 옮겨간 직장이 잘된다는 보장을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술을 한잔 먹고 집에 들어가서 집사람과 얘기를 나눴죠. 저희 집사람은 말수가 적은 편입니다. 몇가지 물어보더라구요. -그게 뭡니까. ▲승진기회와 월급을 어디가 많이 주냐는 것이었습니다. 하하. 그래서 새 직장이 더 많다고 답했더니 그럼 그 쪽으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반문했죠. 여기서는 김진만 행장께서 나를 좋게 봐주시고 잘 돌봐주시는데 새 직장에 가면 그런게 다 없어지지 않느냐고. 집사람 말이 “그 분이 당신과 평생 같이 살기라도 하느냐. 언젠가는 홀로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모든 것을 명확히 해주더군요. 이직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집사람은 직장 옮겨서 좋을지 안 좋을 지에 관해서 점을 보러가겠다고 하더라구요. 점장이 왈 “승진을 하거나 좋은 곳으로 갈 운명” 이라고 말했다더군요. 그당시 한미은행에서 막 대리로 승진했을 때라 또다시 승진하지는 않을 것 같고 그럼 좋은 데로 갈 운명인가보다 생각했죠. 제 친한 친구들 7명에게도 일일이 물어봤더니 다들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를 해주더군요. <여신, 외환, 신탁, 기획… 은행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하나은행으로 옮긴 다음에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91년 하나은행으로 이직하고 나서는 온갖 일을 두루두루 다 했습니다. 본점영업부여신, LC, 외환, 신탁운용, 기획, 결산 등등이죠. 영업부 차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30대 그룹 여신 외환업무나 기관섭외 및 마케팅 담당으로 일했습니다. 주로 영업쪽 일을 많이 하다보니 하루는 행장께서 “영업만 해서는 클 수 없다. 이제는 종합기획일을 좀 해봐라”고 하시더군요. 그 후 종합기획 주무과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기획쪽으로 가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행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이사 한 분께 “영업하는 사람을 기획으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회사를 그만두라는 것 아닙니까”라고 항의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기획일을 담당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도움이 되고요. -하나은행에서 이직 제의를 받았을 때 유학을 보내준다는 등의 조건들도 있었다면서요. 이행이 됐습니까.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죠. 하하. 승진은 빨리 했습니다만 일을 정말 많이 시키더군요.(웃음) 일은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일요일에도 집에 거의 못갔을 정도였으니까요. 하나은행 영업부 차장시절에 신상품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해외DR 발행 이야기 좀 들려주시죠. ▲금융권에서 저희보다 먼저 해외DR을 발행한 건 장기신용은행 뿐이었습니다. 그게 96년이었는데 실패했죠. 그때 김영삼 정부가 중소기업지원 명목으로 한시적으로 금융권 해외DR 발행을 허용했던 때였습니다. 장기신용은행이 실패할 무렵 저희는 한참 로드쇼(road show: 유가증권을 발행하려는 회사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설명회. 주요 국제 금융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진행된다. 유가증권 발행시에 실시하므로 일반적 기업설명회인 IR과는 구분된다)를 진행중이었습니다. 제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준도 못됐고 그때 국제부는 현 하나은행 국제부 임원이신 최종석 상무께서 맡고 계셨습니다. 해외DR 발행의 경우 은행마다 발행 담당팀이 달랐어요. 국제부에서 맡는 곳도 있었고 다른 팀에서도 했는데 하여간 서로들 하려고 난리였습니다. 로드쇼라는 것이 해외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재미도 있고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일이잖습니까. 하나은행에서 해외DR 발행과 관련된 팀은 국제부와 저희 종합기획부였는데 저희는 서로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일이 워낙 많으니까요. 의견차도 있었구요. 결국 저보고 그 일을 맡으라고 위에서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왜 가야합니까?” 라고 질문했더니 “영어는 잘 못해도 담판을 잘짓는 당신 같은 사람이 제격이다”라고 하시더군요.(웃음) 가격 프라이싱을 해본 사람이 가야된다는 논리였죠. 그래서 한달동안 6개 외국계 증권사 서울지점장들을 저녁마다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해외DR 발행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자문을 구했어요. 하루도 거르지않고 저녁마다 2시간씩 강행군을 해서 대충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통된 답은 “동서양 문화는 다르지만 결국 DR 발행도 일종의 기싸움이다” 였어요. 흥정에서 밀리면 진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은행이 프리미엄을 받아야 되는 이유에 관한 논리를 마련하고 마음의 준비를 가다듬었습니다. 그런데 장기신용은행이 실패를 하고 돌아오고 나니까 사람들이 별 기대를 안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무튼 해외로 날아갔습니다. 저희는 주간사를 메릴린치나 골드만삭스 같은 큰 회사로 하지않고 조그만 회사로 선정했었어요. 양자가 세계적인 회사긴 하지만 일단 로드쇼가 시작되면 주간사는 발행자편이 아니고 투자자편으로 돌아서거든요. 그래야 투자자들에게 계속 채권을 계속 팔아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동방페레그린증권과 현대증권 등에 주간사 업무를 맡겼습니다. 당시 페레그린 증권이 동양을 잘 이해하는 하우스이기도 했으니까요. 그 후 협상테이블에 앉아 프라이싱을 하는데 1%밖에 못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 가격에는 도저히 발행못한다”고 말하고서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 후 재협상에 돌입해서 3%까지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가격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애초목표는 10%였거든요. 또 다시 지루한 협상이 시작되고 마지막 즈음에 제가 말했습니다. “서로 양보하자. 정 안되면 너희 CEO와 우리 CEO가 담판을 지으면 될 것 아니냐. 난 10%를 생각하고 왔으니 3% 양보하겠다. 너희도 3% 양보해라” 라고요. 그래서 6%로 합의를 봤습니다. 딜을 끝내고나서 하루정도 뒷마무리 작업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저희는 그런 것 없이 일사천리로 일을 마쳤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해외DR 발행이 그룹증자로 이어지면서 많은 분들이 좋은 평가를 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 후에도 발행에 실패한 곳도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무슨 업무를 맡으셨나요. ▲외환위기가 발생할 당시 장기금융전략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주된 업무는 금융권 얼라이언스 준비, 증권회사 진출업무였고 후에 종금사 합병업무도 맡았었습니다. 종금사 합병때는 비밀작업들도 많이 했습니다. 6개월동안 숨어 지내다시피하면서 성사를 위해 노력했죠. 위에서 “모 종금” 이라고 한마디 하시면 일주일 만에 작업을 추진하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자료정리 및 재평가 작업만으로도 눈코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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