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달러화가 기조적으로 약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수출업체들의 수주호조는 이어지고 있고 역외에서도 달러 약세에 베팅하고 있어 이제는 환율을 막을 수 있는 주체는 당국 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환율 방어에 적극 나서기에 상황이 녹록치 않다. 거센 물결을 물리칠만큼의 힘을 갖지 못한데다, 동시에 전개되고 있는 원자재가격 급등 부담을 감내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환율 800원대..당국 `미세조정`
지난 26일 달러/원 환율이 913원을 깨고 10년만에 최저 수준으로 미끄러진데 이어 910선까지 무너지자 외환당국은 결국 구두개입과 물량개입에 나섰다.
지난 30일 신제윤 재경부 국제금융국장 내정자와 안병찬 한은 국제국장은 이날 공동명의로 "시장의 자율조정을 저해하는 과도한 왜곡에 대해서는 적극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혀 시장에 개입 시그널을 줬다.
그러나 개입 당일 환율은 0.3원 반등하는데 그쳤고 이튿날에는 장중 900원까지 붕괴됐다.
그동안 외환당국은 하루 평균 10~15억달러 수준의 개입을 단행했으며 환율 900원이 붕괴된 31일에는 30억달러 규모의 달러화를 사들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개입 규모를 늘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세조정 수준인 `스무딩 오퍼레이션`에 머물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처럼 외환당국이 찔끔찔끔 개입하는 것보다는 적극 방어에 나서주길 바라고 있지만 외환당국의 입장에서는 고민일 수 밖에 없다.
한은 관계자는 "심리적으로 쏠림 현상이 있을 경우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당국의 기본적인 시각이고 이는 늘 유효하다"며 "이날 미국 공개시장위원회(FOMC)의 금리결정을 일단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만 말해 원론적인 수준을 확인하는데 그쳤다.
◇인플레와 수출경기 사이에서 고민
당국이 적극 개입에 나서면서 시중의 달러화를 사들이면 원화가 풀리면서 유동성이 늘어날 것이고 이는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원화 강세를 억제할 경우 원자재를 중심으로 한 수입물가 급등 충격을 고스란히 수용해야 한다. 이데일리가 한국석유공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달 31일 현재 두바이 유가는 지난 2005년 평균치에 비해 64.7% 급등했다. 그러나 원화로 환산한 두바이유 상승률은 43.5%에 그쳤다. 같은 기간 진행된 가파른 환율하락이 고유가 충격을 상당부분 완화해준 것이다.
그렇다고 손놓고 방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중소기업들의 채산성 악화가 심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은이 31일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수출대기업의 경우 상반기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확대로 영업이익률이 상승했지만 수출중소기업의 경우 매출액은 전년동기대비 4.5% 증가했으나 환율하락과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등에 따른 채산성 악화로 영업이익은 23.6% 감소했다.
전종우 SC제일은행 상무는 "당국이 연말까지는 개입강도를 높여서라도 900선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할 것"이라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대선이 끝나고 내년으로 넘어가면서는 800원대를 용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외환당국은 우리 경제 현실에 맞지 않는 환율 레벨을 강조하며 쉽게 환율 하락을 용인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국정감사에서 외환시장 개입 실패 책임과 100조원에 이르는 외환시장 개입 비용 등에 대한 지적이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국의 운신의 폭도 상당히 좁다"고 평가했다.
유가 상승으로 물가는 오르는데 환율 800원대를 좌시할 수는 없으니 유류세라도 인하해서 인플레이션과 환율급락을 동시에 막아보자는 것이다.
전 상무는 "단기적으로 당국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유류세 한시적 인하 정도 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환율 하락요인 너무 많다
연말까지 900원대를 사수한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이 선이 유지될 지에 대해 시장 참여자들은 의문을 표하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미국 경기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고 미국의 금리인하도 당분간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달러화의 기조적 약세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국내 외환시장의 수급은 절대적으로 달러화가 공급우위인 상황이다.
수출이 호조를 보이면서 벌어들인 달러화가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올들어 9월까지 경상수지 흑자 누계는 29억2000만달러에 달해 연간 경상수지 흑자 전망치였던 20억달러를 크게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같은 수주 호조와 해외 펀드 투자 열풍에 따른 헷지 수요로 선물환 매도가 이어지면서 3분기 외환시장에서의 선물환 순매도 규모는 176억달러로 분기 기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해외자본 유입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최근 증시에서 발을 빼는 대신 채권을 대거 사들였다. 9월 외국인 채권 순매수 규모는 70억달러로 전월에 이어 두달 연속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최근 국제금융 시장에서 핫이슈가 되고 있는 국부펀드도 환율에 하락압력으로 작용하는 요인이다.
중동의 오일머니와 아시아의 거대한 외환보유고를 기반으로 국부펀드들이 잇따라 조성되면서 국제 금융시장의 큰 손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들 자금이 달러화 자산 보다는 신흥 시장으로 향하면서 달러화 약세, 이머징 마켓 통화 강세를 이끌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당국, 환율하락 이미 용인" 시각도
소극적이긴 해도 우리 당국이 환율하락(원화절상)을 이미 수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상한 것이 증거로 꼽힌다. 고금리와 환차익을 노린 해외 채권투자자금이 거세게 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한은이 연쇄적인 금리인상에 나선 것은 추가적인 자금유입을 감내하겠다는 신호라는 설명이다.
조중재 굿모닝신한증권 채권전략가는 최근 보고서에서 "환율하락은 통화정책 측면에서 금리인상을 제약하는 요건이라는 시각이 많다"면서도 "그러나 최근의 환율하락은 국지적인 지역통화의 강세가 아닌 전세계적인 달러약세라는 점에서 금리에 미치는 영향은 반대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조중재 전략가는 홍콩의 예를 들면서 "고정환율제를 고수할 경우 유동성 폭증과 자산가격 급등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며, "통화절상을 용인하며 정책금리를 인상한 싱가포르와 베트남의 사례는 이머징 국가들의 통화정책이 (금리를 내리는)미국과 탈동조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