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그리고 위기는 교훈을 남긴다. 그러면 최근의 금융위기가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교훈을 얻으려면 위기에 대한 성격규정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97년 외환위기는 “과잉차입-과잉투자-과잉다각화”로 정의되었고, 당연히 사후대책도 이런 방향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03년의 금융위기는 아직 제대로 된 성격규정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름의 대안으로, 우리의 카드위기와 기본적인 맥락을 같이하는 엔론사태 이후 미국 신용평가의 대응과정을 살펴보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미국 금융시장이 엔론사태로 받았던 충격은 참으로 대단했다. 98년의 LTCM 부도와는 달리 01년 엔론-월드컴-타이코의 연쇄부도는 심각한 시스템 위기로 받아들여졌다. SEC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 신용평가도 벼랑 끝으로 내 몰렸다. 급기야 Moody’s는 02년 초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시장에 그들의 과오를 묻고, 시장이 원한다면 신용평가의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00여 차례의 “시장과의 대화”를 거쳐 반년 후에 내놓은 것이 바로 유동성리스크와 정보투명성에 대한 평가기준 강화였다. S&P도 비슷한 대응을 했다. 이번 칼럼은 바로 이 유동성리스크에 대한 것이다.
◇ 신용카드의 약한 고리: 외환카드 or LG카드
신용카드에 대한 금융시장의 부담감이 점증하던 02년 11월 외환카드 채권을 중심으로 투매가 벌어졌다. 전형적인 ‘Devil takes the hindmost’ 또는 ‘꼬리 자르기’다. 카드 4사 가운데 가장 약해보이는 외환카드를 잘라내면서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시장의 본능’이다. 시장 대부분은 ‘LG-삼성-국민’으로 이어지는 3사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지난번 칼럼에서 다룬 ‘암묵적 지원’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문제가 된 것은 LG카드였다.
02년은 물론이고 03년 4월까지도 LG카드가 가장 약한 고리라는 점을 인식한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LG카드의 실패원인을 제대로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꼽는 LG카드의 실패원인은 숨겨진 부실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어느 카드사나 비슷한 상황이었다. 신용카드 부실의 원인으로는 타당하지만, 왜 가장 약한 고리가 하필 LG카드였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적어도 4대 카드사는 고객기반이나 사업구조에서 거의 차이가 없었다. LG카드가 최대 카드사였기 때문에 부실이 집중되었다는 설명은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위기에서 1위 업체가 먼저 무너지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역시 결과론에 지나지 않는다.
카드사간에 차이를 보였던 것은 경영전략과 재무부문이었다. 경영전략부터 보자면 상대적으로 빨리 위기관리체제로 넘어간 회사가 그나마 용이하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재무적인 기반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역시 근본적인 차이는 재무에서 찾아야 한다.
Moody’s의 신용카드 평가방법론을 보면 refinancing리스크(유동성리스크와 유사 개념)를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꼽는다. LG카드의 약점은 과도하게 단기자금에 의존한 자금조달 구조였다. 이러한 재무정책은 결국 파행적이고 편법적인 자금조달로 이어졌고, 이것이 SK사태와 맞물리면서 단번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더욱이 02년말 은행의 동일인여신한도 강화조치로 그룹의 우회적인 재무적 지원도 어려워진 상황이어서 손을 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약한 고리로 평가되던 외환카드는 LG카드보다 6개월 전에 자금줄이 막혔음에도 버틸 수 있었다. 당시 외환은행의 입지가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단기자금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낮았다는 점이었다.
◇SKG사태와 유동성리스크
카드위기의 촉매로 작용한 SKG사태는 유동성리스크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우선 분식의 가장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던 무역금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절차적 측면에서 은행의 도덕적 해이가 부각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유동성리스크에 대한 시장의 오판이다. 일반적으로 시장은 무역금융을 사실상의 매입채무로 간주한다. 수출영업이 지속되는 한 안정적인 자금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SKG사태 이후 SK의 급격한 Usance위축은 무역금융은 결코 안정자금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휘발성이 강한 자금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또 한편으로 SKG사태는 현금유동성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태 직전 SK는 적극적인 장단기자금조달을 통해 약 2조원 정도의 현금유동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금융시장의 충격은 곧바로 폭발적인 자금회수 러시로 이어진다. 시장이 냉정을 회복하고, 당국이 개입할 때까지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불과 몇 주가 고비다. 이때 평소에 닦아 놓은 신용도와 보유 현금유동성이 빛을 발한다. 많은 기업들이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진다. 일단 무릎을 꿇으면 시장은 야수로 변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산매각이나 유상증자, 당국의 지원도 사후약방문일 뿐이다. 그러나 이 순간을 무사히 넘기고 나면 어떻든 활로를 찾을 수 있다. 예전의 영광을 오롯이 되찾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기업경영의 계속성만큼은 유지할 수 있다.
◇유동성리스크에 대한 관심 필요
다시 우리시장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최근 우리시장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용어는 아마도 양극화일 것이다. 이는 유동성리스크에서도 적용된다. 기업의 단기차입금 의존도와 보유 현금유동성이 동시에 확대되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유동성리스크에 대한 극단적인 무시와 극도의 예민 반응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최근 우리 자본시장을 피폐하게 하고 있는 심각한 ‘수익률곡선의 평탄화’를 낳고 있다.
시장의 관심은 온통 설비투자부진에만 쏠려 있지만 사실 이는 경제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국 제조업의 경우2000년 이후 금융자산이 유형자산을 초과하는 ‘제조업의 금융화’가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간단히 공업의 발전단계를 보아도 초기 가내수공업에서 출발하여 점차 원격화되고 결국은 해외진출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유형자산투자가 해외지분투자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러한 기업의 사업범위 확대는 변동성의 확대를 의미하는 만큼, 이에 대한 보험으로 보유 현금유동성의 확대가 당연히 수반되어야 한다. 최근 우리기업 일부의 급격한 현금유동성 확대는 세계화 전략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며, 실제로 선진국의 경쟁기업과 비교해보면 결코 많은 수준도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최근의 ‘수익률곡선 평탄화’는 설비투자부진보다는 유동성리스크에 대한 불감증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단기차입금 의존도의 확대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드물고, 현금유동성의 확대를 질타하는 목소리는 매우 크다. 심지어는 기업의 투자의욕부진 및 기업가정신 쇠퇴의 상징으로 몰아붙인다. 시장 환경의 변화를 무시하고 정부주도 경제개발과 관치금융 시대의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적 손실과 비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투자자의 입장에서 볼 때 관성에 의한 편향으로 시장의 상식과 교과서적인 원론 사이에 큰 간극이 발생했을 때가 참으로 어려운 순간이다. 이럴 때마다 한 번의 큰 기침으로 시장의 질서를 잡아주는 큰 인물의 존재가 아쉬워진다. 이런 관점에서 미국 채권시장에서 절대적인 신망을 받고 있는 Bill Gross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엔론사태 직후인 2002년 3월, 미국 최대채권펀드 PIMCO의 전설적 CIO인 Bill Gross가 발표한 보고서 하나가 시장을 충격 속에 몰아 넣었다. 주식회사 미국(Corporate America)으로 통하는 GE의 유동성리스크 확대 정책, 다시 말해 회사채를 CP로 대체하려는 재무정책을 맹공한 것이다. 단기적인 효율성 제고를 위해 금융과 기업간의 신사도를 배신했다는 주장이었다. 격렬한 논쟁 속에 GE의 채권가격은 폭락했고, 결국 3주만에 GE는 Bill Gross의 지적을 대부분 수용한 재무정책의 전환을 발표한다. 이후 미국 기업의 장기회사채 발행이 줄을 잇고, 결국 credit market에서의 회사채 비중은 급등한다.
이 에피소드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는 것은 엔론사태 이후 미국 금융시장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고, 결과적으로 시장의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 우리의 금융위기가 원인과 경과에서 엔론사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Bill Gross의 외침은 우리에게도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