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2세대 최고경영자인 이건희 회장이 12월1일자로 취임 20주년을 맞이한다.
이 회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꿔라'는 혁신과 '질(質) 중시 경영'으로 대표되는 '신경영'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곧바로 닥친 외환위기 당시엔 '선택과 집중'의 경영전략을 전개해 삼성의 글로벌화를 성공시킨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취임 20주년에 터진 '비자금 로비 의혹'으로 삼성그룹은 그 어느 때보다 호된 시련을 겪고 있다.
삼성은 애초 오는 12월5일 이건희 회장의 취임 20주년 행사을 갖기로 오래전에 계획했었다. 그러나 하루전인 12월4일엔 '삼성비자금 특검법'이 국무회의에서 의결 공표될 예정이다. 삼성은 결국 이 행사를 취소했다.
◇ 비자금 사태로 빛바랜 20주년..글로벌 일류기업 `지휘` 공로는 인정돼야
'삼성 비자금 로비 의혹'을 둘러싼 진실공방이 전개되고 있지만, 이와는 별도로 이건희 회장의 취임 이후 지난 20년간 삼성그룹이 한국경제에 이바지한 공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평가다.
지난 20년간 이 회장은 "넘버원(No 1) 또는 온리원(Only 1)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월드베스트 경영철학을 펼쳤고, 삼성 계열사들은 기술과 제품, 디자인 등에서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 전사적인 역량을 집중해 왔다.
난공불락으로만 여겨졌던 소니도 꺾었다. 2002년 시가총액에서, 2005년엔 브랜드가치측면에서 잇따라 소니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전자기업중 하나로 성장했다. 이제는 일본 언론들이 "삼성을 배우라"고 조언하는가 하면, 일본 전자업체들이 힘을 합쳐 '타도 삼성'을 외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삼성의 성과는 여러 가지 경영지표로도 확인할 수 있다. 매출액은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1987년과 비교할 때 17조원에서 152조원(2006년말 기준)으로 8.9배 성장한 가운데 세전이익은 1987년 2700억원에서 14.2000억원으로 무려 52.6배나 늘어났다.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140조원으로 140배, 수출은 9억달러에서 663억달러로 73.7배 급증했으며, 해외직원을 포함한 임직원수는 16만명에서 25만명으로 1.7배 증가했다.
이에 따라 삼성의 국가경제 기여도는 매출액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848조원의 18%에 달하고 있고, 시가총액은 전체 상장사 시가총액의 20%, 수출액은 국가 전체 수출의 21%나 차지하고 있다.
◇ 이건희 회장 10년 주기로 찾아오는 '위기'..이번에도 극복할까
이건희 회장은 가족끼리 제사를 지내고, 묘소도 별도로 찾았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아마도 자식으로서 선대회장의 업적에 누를 끼친데 대한 죄송한 마음 때문에 외부인들이 참석하는 추모행사를 애써 피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건희 회장은 이후에도 외부 노출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이 회장이 평소에도 자택에서 업무를 자주 보는 스타일이어서, 삼성사태 이후 자택인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삼성그룹이 벌써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회장을 비롯해 핵심 경영진들은 검찰과 특별검사의 수사를 앞두고, 이미 출국마저 금지된 상태이다.
12월중 앞당겨 실시하려던 정기 임원인사도 물이 건너갔고, 계열사의 사업과 투자를 조정해 줘야 하는 그룹 전략기획실은 '비자금 로비 의혹' 해명에 매달리면서, 업무를 뒷전으로 밀어 놓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삼성이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LCD(액정표시장치)와 메모리 반도체분야를 중심으로 일본, 대만, 미국 등 경쟁국 기업들이 국경을 뛰어넘는 합종연횡과 공격적인 투자를 앞세워 '삼성 따라잡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우려섞인 소식도 전해진다.
그래선지 재계 및 법조계에선 "검찰과 특별검사가 삼성의혹을 규명하는데 있어 국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수사 종결 이후에도 삼성이 국가경제를 위해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만큼 국익에 대한 고민 내지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 취임 10주년 때 터진 환란(換亂)의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때문에 이 회장이 '삼성사태'를 어떻게 수습해 나갈지 주목된다고 재계 관계자들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