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거리가 됐던 건 직원들의 복장. 그 회사는 평소에 자원봉사 현장에 나갈 때마다 늘 회사 로고가 찍힌 붉은 색 조끼를 통일해서 입었었지만, 이 때만은 직원들에게 회사 조끼를 입지 말도록 지시했다.
당시 현장에 봉사활동을 나갔던 한 직원은 "사고가 발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기름이 흘러나온 배가 어느 정유사의 배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정유회사 직원들이 단체로 몰려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장면이 카메라에 찍히면 '저놈들이 기름 흘린 놈들'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봉사활동 나가서 회사 로고를 숨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기분도 찝찝했다"고 말했다.
기업이 얼마나 '국민여론'에 민감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기업'은 모든 기업들의 지향점이지만 이처럼 실제 현장에서는 여러가지 부작용과 불협화음이 생긴다. 국민여론이라는 실체가 늘 변화무쌍하고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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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론에 순응하는 기업이 국민기업?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차원에서 국민기업을 키우자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실행파일로 접어들면 국민기업이라는 개념은 시장원리와 자주 충돌한다.
기업들이 앓고 있는 '국민기업 콤플렉스'는 합당하지 않은 여론이라도 국민정서로 규정되면 이를 따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그런 과정에서 기업의 돈이 엉뚱하게 새고, 때로는 그렇게 샌 돈을 편법으로 메우는 변칙이 발생한다.
국민기업 콤플렉스의 부작용은 기업들이 여론을 의식한 단기처방에 급급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문제를 풀지 못하고 덮기만 한다.
삼성중공업의 사례에서도 기름유출의 책임소재 조사 과정이 체계적이지 못하다든가 손해배상액이 너무 제한적이라든가 하는 미래지향적인, 시스템의 근본적 개선과 관련한 문제들은 1000억원의 지폐다발 속에 파묻히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 똑같은 사고가 또 일어난다.
지난 2006년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때 삼성그룹이 그룹 오너 사재 8000억원을 사회 환원한 것도 그런 예다. 원인에 대한 진단이나 해결책 제시 없이 오로지 국민 여
론만을 잠재우는 게 목표였다.
국민기업 콤플렉스의 주범은 마구잡이식 여론몰이와 이를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지만, 때로는 그 이면에 기업들의 투명하지 못한 경영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숨겨야 할 부분이 많다보니 늘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 국민기업은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
국민들이 앓고 있는 '국민기업 콤플렉스'는 기업들의 콤플렉스와 다소 방향이 다르지만 역시 시장원리와 자주 충돌한다. 국민기업이라는 용어를 인구에 회자시킨 원조격인 기아차부터 시장원리와는 거리가 먼 정치논리의 대상이었다. '주인 없는 대기업이니 국민기업'이라는 엉뚱한 논리였지만 국민기업이라는 포장을 씌우면 여론의 물꼬가 달라진다. 누적적자와 회계부정, 강성노조 등 기업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를 국민들이 책임지자는, 시장원리와 어긋나는 주장도 때로는 먹혀든다.
실제로 국민기업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전략이 성공한 사례도 있다. KCC 그룹과 현정은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를 놓고 벌였던 경영권 분쟁에서도 국민기업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현정은 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를 국민기업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을 모티브로 여론의 물꼬를 돌려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엘리베이터의 소유권은 현대가가 쥐고 있다.
◇엔론이 국민기업인가 구글이 국민기업인가?
분식회계로 파산한 엔론은 부정의 전말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국민기업의 조건을 대부분 갖춘 유망주였다.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에서 7위에 올랐고, 창업 후 15년만에 1700%의 초고속 성장을 달성한 신화였다. 그러나 그런 규모나 명성이 건전성까지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가입자만 2천만명, 직원만 해도 무려 5만4천명에 달했던 월드컴은 미국 회계 스캔들 사상 규모가 가장 큰 110억달러의 회계부정을 저질렀다.
기업 매출이 국가 GDP의 20%가 넘는 핀란드의 국민기업 노키아도 1994년 뉴욕증시에 상장하면서 핀란드에서는 '노키아가 과연 핀란드 기업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노키아가 국민여론을 의식해서 핀란드 증시에 상장했다면, 국가에 기여하는 차원에서 핀란드 중소 부품업체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면 과연 세계 1위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을까도 의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기업, 입사 지원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기업으로 꼽히는 구글이나 애플이 미국의 국민기업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들이 GE나 포드같은 국민기업에 더 가까운 회사들보다 덜 매력적인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일이다.
미국의 국민기업으로 부르길 아무도 주저하지 않는 GE의 제프리 이멜트 회장은 위대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4가지 요소로 혁신, 경쟁의식, 인재, 성장에 대한 욕구를 꼽았다. 시장이 원하는 기업이 위대한 기업이고 그게 바로 국민기업이라는 의미다.
최근 미국 경영잡지 포춘이 올해 전세계의 존경받는 50대 기업명단을 발표했는데 그 안에 한국 기업은 없었다. 상위권에 속한 10개 기업들은 국민들보다는 세계의 소비자들에게 사랑받는 기업이고 투자자들에게 인기있는 기업들이다. 시장이 선택한 기업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혹시 당신 회사가 국민기업이냐'고 묻는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질문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