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반세기)”가자 공업대국으로”..중화학 육성①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경제구조 대전환
`산업구조 고도화` ` 방위산업 육성` 노린 복합정책
  • 등록 2005-06-28 오후 12:40:40

    수정 2005-06-28 오후 12:40:40

[edaily 이종석기자]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 육성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73년 1월12일 연두기자회견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단호한 목소리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발표했다. 80년대 비젼으로 제시한 ‘수출 100억달러, 1인당국민소득 1000달러’ 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 경공업에서 벗어나 중화학공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반 만년 농업국가에서 벗어나 중후장대형 신흥 공업국가로 경제구조를 확 바꾸겠다는 통치권자의 의지 표명이었다, ◇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경제구조 大전환 ‘중화학공업화’ 선언의 배경에는 당시 급변하는 국내 경제여건이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경제는 일대 전환을 요구받고 있었다. 정부의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경제성장률은 목표치를 초과하는 실적을 보이고 있었지만 경제체질은 여전히 허약했다. 수출품의 주종은 가발이나 농산품 등 노동집약적 상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저부가가치 상품으로는 더 이상 고도성장을 이끌어 가기 불가능하다는게 정부와 경제계의 판단이었다. 그동안 경제를 지탱해 온 경공업 주도 전략에도 제동이 걸렸다. 말레이시아 태국 등 후발 개도국들이 저가의 경공업 제품을 내세워 대거 추격에 나선 것이다. 중간재와 자본재 부문의 해외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불안요인이었다. 자본재나 소재산업 육성 없이는 항구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경제 전반에 확산됐다. 바야흐로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의 대대적인 산업구조 전환 압력에 직면한 것이다. 문제는 자금과 시간이었다. 통상 중화학공업은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는데다 투자자금의 회임기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국내 기업들이 이 같은 대규모 장기투자를 감내할만한 기초체력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8.3사채동결 조치 이후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개선되면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장기투자에 대비할만한 자금과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다는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싸우면서 일하자”…자주국방 병진정책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또 다른 배경으로 ‘방위산업 육성’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의 안보환경 변화는 중화학공업화를 촉진하는 기폭제가 됐다. 국내적으로는 68년 1월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에 이어 미국 정찰선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됐고, 11월에는 울진 삼척에 무장공비가 침투하는 등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국제변수로는 70년 2월 닉슨독트린이 발표됐다.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이 하라. 미국은 빠지겠다”는게 독트린의 주요 골자였다. 이해 7월 실제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했다. 닉슨독트린은 한국이 방위산업 건설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된다. 더 이상 미국에 의존하는 안보전략에 안주할 수 없으며, 하루라도 빨리 자주국방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박 정권 내부에 깊숙히 파고들었다. 70년 7월 박 대통령은 소구경 화기를 생산할 수 있는 자체 공장을 건설하라고 관계부처에 지시를 내린다. 이 지시에 따라 72년부터 기초화기 시제품이 생산됐지만 제품 성능은 영 신통치 못했다. 병기 생산에 필요한 초정밀 기술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친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의 기반위에서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은 이 같은 실증적 체험을 거쳐 나온 것이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산업구조 고도화라는 ‘경제적 목적’과 방위산업 육성이라는 ‘군사적 목적’이 결합된 복합 정책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 6대 전략산업…철강 비철금속 기계 석유화학 조선 전자 중화학공업을 육성키로 하면서 방위산업을 국가주도로 추진할 것인 지, 민간주도로 추진할 것인 지를 놓고 정부 부처간에 논쟁이 가열됐다. 재무부 기획원 등 경제부처와 청와대 비서실은 민간주도를 선호한 반면 국방부는 국가주도를 주장했다. 국방부는 방위산업 전담 공기업을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최종 결론은 박정희 대통령이 내렸다.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을 공기업 형태로 육성하면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를 경우 기업의 존립과 생존을 위해 자칫 전쟁 불가피론을 유발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 ‘민간주도’의 손을 들어줬다. 대통령의 언급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은 민간기업이 주도하고, 정부는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체제로 자리를 잡게 된다.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 선언 이후 정부는 개별산업육성법을 제정하고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산업구조 개편에 착수했다. 73년 5월 위원회 산하에 중화학공업추진기획단이 출범하면서 ▲철강 ▲비철금속 ▲기계 ▲석유화확 ▲조선 ▲전자 등 6개 분야를 중화학공업 전략산업으로 선정하고, 업체별로 구체적인 지원에 나서게 된다. 중화학 육성 대상으로 선정된 기업들에게는 내국세와 관세가 감면되고 대출을 포함한 각종 금융지원이 이뤄지는 것은 물론 수입규제를 통한 국내 판매가격 보조 등 정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이 강구됐다. 이 같은 지원에 힘입어 철강분야에서는 포항제철이 2,3,4기 설비확장을 통해 규모를 더욱 늘렸으며, 비철금속 분야에서는 온산공업단지에 아연제련소와 구리제련소가 건설됐다. 또 석유화학 분야에서는 기존 울산 석유화학단지의 시설 확장에 이어 여천에 제2 석유화학단지가 건설됐으며, 조선분야에서는 현대 울산조선소, 대우 옥포조선소, 삼성 죽도조선소가 건설됐다. 기계공업 분야에서는 창원에 대규모 기계단지가 조성됐으며, 전자부문에서는 최첨단 전자기기 생산을 위해 구미에 전자공업 1,2,3 단지가 건설됐다. 하지만 이 같은 산업기지 건설이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법체계로는 산업기지 조성과 분양에 관한 인허가를 받는데만도 몇 년이 걸릴 정도로 복잡하고 규제일변도였다. 정부는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73년 12월 ‘산업기지개발촉진법’을 제정하고, 지원실무를 담당할 산업기지개발공사를 신설하게 된다. 산업기지개발공사는 이후 79년까지 창원, 여천, 온산, 구미, 포항, 북평, 아산 등에 8개 산업단지를 건설하며 중화학공업 육성의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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