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in | 이 기사는 08월 18일 11시 49분 프리미엄 Market & Company 정보서비스 `마켓in`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넘치는 유동성에 물가는 오르고 인플레이션 우려에 금리는 올라간다. 주택을, 신용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가계는 더 이상 대출 원금은커녕 이자마저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가계는 빚 정리를 위해 주택을 매물로 내놓고 그마저도 없는 가계는 결국 파산에 이른다. 주택 가격은 떨어지고 은행이 가진 담보인 주택은 부실화 돼 결국 금융 시스템마저 붕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 가계부채, 문제는 `속도`와 `구조`
가계부채에 대한 정부와 시장의 우려는 두 가지로 모아진다. 빠르게 증가하는 속도와 외부 충격에 취약한 구조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1년 3월 현재 가계부채 규모는 801조원이다. 1999년 말 부채가 214조원이었으니 매년 13% 가까이 증가했다. 국내총생산(GDP)는 매년 6.8%씩 늘었다. GDP보다 부채가 두 배 빠르게 늘었다. GDP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0년 49%에서 2009년 81%로, 가처분소득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0년 81%에서 2009년 143%로 훌쩍 뛰었다.
사실 가계가 돈을 빌린 만큼 갚아나갈 수 있다면 부채 규모가 얼마가 됐든 문제될 것은 없다. 문제는 빚이 늘어나는 만큼 빚을 갚을 능력은 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신용평가의 가계대출과 금융기관 자산건전성 보고서에 따르면 부채 상환 능력을 보여주는 개인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대출 비율은 2004년 95.2%에서 꾸준히 증가해 지난해 116.3%로 100%를 넘어섰다. 개인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대출이 100%를 넘는다는 것은 가계가 1년간 벌어들인 가용소득이 은행 등 금융권에서 빌린 돈을 갚기에도 부족하다는 의미다.
게다가 가계 저축률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가계저축률은 2.8%로 OECD 평균인 7.1%에 크게 못 미쳤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이은미 연구원은 저축률이 낮아지는 이유 중 하나로 가계부채 증가에 따른 이자지급 부담이 늘어 저축 여력이 줄어든 점을 꼽았다. 부채가 늘어나는 만큼 저축률은 낮아지고 있어 점점 빚을 갚기 어려운 구조로 가고 있는 것이다. 주요국들과 비교해도 경제규모 대비 가계부채 규모는 높은 수준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부분 선진국들이 부채를 축소한 반면 우리 가계의 부채는 여전히 늘고 있다. 한국은행 통화신용정책 보고서는 한국은 OECD국가 25개국 중 부채증가율은 11위에 속해 있으며, GDP대비 86%, 가처분소득대비 13%가 부채라고 했다.
부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택담보대출도 단기·일시상환·거치식 위주로 운영됐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주택담보대출의 80%가 원금상환 없이 이자만 내고 있다. 만약 주택 가격 하락으로 담보 가치가 떨어져 은행이 자금회수에 나서면 급격한 차환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홍종학 경원대학교 교수는 "한국의 주택담보대출은 일정기간 동안 이자만 갚고 만기에 원금을 갚는 구조인데다 그 기간도 3년정도로 짧아 금리가 오르거나 부동산 가격이 떨어져 자산가치가 하락하는 등 외부 자극이 주어지면 가계가 감당하기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무엇보다 상호금융이나 새마을금고 등 제2금융권을 중심으로 가계대출이 증가하고 있는 점도 위험요소로 꼽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월 말 비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317조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2조원 넘게 늘었다. 제2금융권 대출은 주로 저신용자들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만큼 부실가능성이 높다. 주택담보대출 일시상환 비중도 은행권보다 높다. 그만큼 외부충격에 쉽게 흔들릴 수 있다.
◇정부 대책 실효성 있을까 정부도 가계부채를 우리 경제의 `폭탄`으로 인지하고 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가계부채 때문에 잠이 안 올 지경"이라 말한 이후 금융당국은 지난 6월 가계부채를 연착륙시킬 종합대책을 내놨다. 정부는 부채 증가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고위험 주택담보대출에 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BIS) 위험가중치를 붙여 적용하도록 했고 제2금융권의 경우 대손충담금 적립률을 은행수준으로 단계적으로 강화하도록 했다. 대출 공급자인 금융사 규제를 통해 대출 총량 자체를 줄이겠다는 의도다.
구조 개선을 위해서는 가계 대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언급됐던 단기.거치식 변동금리 중심의 대출을 장기.비거치식.분할상환 고정금리 대출로 변화시키는 방안을 내놨다. 은행들은 현재 5%에 불과한 장기.비거치식.분할상환 고정금리 대출을 2016년까지 30%대로 올려야 한다. 은행의 장기자금 확보를 위해 커버드본드(금융사가 주택담보대출 등 우량자산을 담보로 발행하는 채권) 발행을 활성화하도록 하고 변동금리 대출을 고정금리 대출로 전환할 때 중도상환 수수료를 면제해주는 방안도 제시됐다.
글로벌 신용평가사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S&P는 "한국 금융당국이 증가하는 신용카드와 가계부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발표한 규제 대책으로 한국 자산유동화증권(ABS)과 주택저당증권(RMBS)에 대한 장기적인 리스크가 완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일문 한국신용평가 연구원도 "정부가 가계부채 문제를 인지하고 시스템 구축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는 의미를 둔다"면서도 "가시적으로 해결의 모습을 보일만한 대책은 아니었다고 본다"고 선을 그었다. 한상완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연구본부장 또한 "공급자인 금융기관 안정화 방안은 긍정적이지만 가계부채 문제도 결국 수요와 공급의 문제인 만큼 수요자인 가계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당초 검토하던 총부채상환비율(DTI) 확대적용이나 경제성장률을 뛰어 넘는 가계대출분에 대해 금융기관에 별도의 준비금을 쌓도록 하는 등 강도높은 대책은 모두 빠진 데 대해 알맹이가 빼진 정책이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홍종학 경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가계부채의 핵심은 DTI인데 이를 빠뜨려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는 “정책이 용두사미가 됐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번 대책의 핵심은 단기.변동금리 대출을 장기.분할상환.고정금리로 바꾸겠다는 것인데 은행들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정부가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지금 고통스럽더라도 구조 개혁을 이루지 않으면 더 위험해 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커버드본드 등 발행을 활성화해 은행들이 장기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마련이 시급하다”고 평가했다.
◇가계부채 `뇌관` 저신용대출자 “출구가 없다”?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가계부채의 뇌관으로 불리는 1분위 저신용대출자들을 위한 서민금융지원부분이다. 은행권 대출 억제는 한계선상에 있는 이들을 더 금리가 높은 대출을 받도록 밑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신용자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빚으로부터 벗어날 뚜렷한 출구전략이 없다는 점이다. 정부는 햇살론, 미소금융 등 서민대출을 통해 충분히 해결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일부에선 결국 더 큰 빚만 지우는 것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이건호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저신용자들의 문제는 서민금융대책 차원에서 방법을 찾아야 할 문제"라며 "개인 파산과 같은 선택 있을 수 있지만 이 또한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판단했다. 서민금융문제는 전체 가계부채 문제와 별개로 두고 햇살론 등 정부와 금융사의 협의 하에 공급을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홍종학 경원대학교 교수는 "근본적으로 빚으로 빚을 해결해주겠다는 정부의 인식이 변화할 필요가 있다"며 "무조건 돈을 빌려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 또한 “저신용 대출자 문제는 서민금융을 통한 대출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이 부분은 금융이나 경제적으로 해결하려는 것보다 일정 부분의 사회적 비용을 감수하고 정부정책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설명했다. 언제까지 금융기관 팔비틀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석준 금융위원회 상임위원은 “물론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 가계를 중심으로 대출을 해줘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쥐어짜서도 안된다”며 “중요한 것은 정부는 가계부채 문제를 인식하고 있고 서민금융 기반대책을 꾸준히 진행해갈 것이라는 점”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