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하정민기자] "나병 환자 취급 좀 받으면 어때? 결국 뉴욕증권거래소를 접수한 사람은 나인걸"
세계 최대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미국 2위 ECN(전자거래 네트워크) 아키펠라고의 합병 소식이 미국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212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콧대높은 NYSE가 전자 거래라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 아키펠라고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두 기관의 합병으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인물은 다름아닌 아키펠라고의 제리 푸트남 최고경영자(CEO)다.
푸트남과 NYSE는 흥미로운 인연을 갖고 있다. 푸트남은 4년 전인 2001년 제휴를 추진하기 위해 NYSE를 방문했다. 그러나 도도한 NYSE 임원들은 그를 푸대접했다. 일부 임원은 "우리가 절대 당신네 전자 시스템을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내놓고 그를 비웃었다. 당시 아키펠라고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그 자리에 동석했던 제이미 셀웨이는 "그들은 우리를 `나병 환자(leper)` 처럼 대했다"고 전했다.
4년 후 상황은 360도 바뀌었다. 명성에 걸맞지 않게 사람이 주식매매를 성사시키는 구식 방식만을 고수해 온 NYSE는 살아남기 위해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고 결국 아키펠라고를 선택했다.
두 기관의 합병 조건도 아키펠라고에 유리하다는 평가가 많다. NYSE와 아키펠라고는 합병회사인 NYSE 그룹의 지분 7대 3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NYSE 주주들은 아키펠라고에 비해 NYSE 가치가 지나치게 낮게 산정됐다며 볼멘 소리를 내고 있다.
푸트남은 "4년 전 나는 확신했다"며 "지금은 NYSE 관계자들로부터 비웃음당하는 처지지만 반드시 내가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을 믿었다"고 강조했다.
1996년 아키펠라고 설립 전 일개 주식 중개인에 불과했던 무명의 푸트남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월가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현재 위치에 올랐다.
올해 46세의 푸트남은 지난 1981년 펜실베니아 대학을 졸업한 후 월가에 진출했다. 푸트남은 12년간 총 7개 증권회사에서 일했지만 이중 2곳에서 `짤리는` 비운을 겪었다.
푸트남을 해고한 증권사는 오펜하이머와 푸르덴셜. 시카고 트리뷴은 푸트남이 지난 1993년 당시 직장이던 프루덴셜에서 해고당한 이유가 "회사의 허락을 받지 않고 역외 상품거래를 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푸트남은 이에 대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푸트남은 1994년 온라인 주식중개 회사인 테라노바 트레이딩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2년 후 아키펠라고 설립의 모태가 됐다. 그러나 푸트남의 고전은 계속됐다. 두 명의 동업자가 그를 고소하는 등 안팎으로 바람잘 날이 없었다.
전자거래의 성공을 확신한 푸트남은 이에 개의치않고 아키펠라고의 확장에만 주력했다. 그는 외형 확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 거대 증권거래소와 합병을 추진했고 한때 나스닥도 물망에 올랐다. 결국 이 전략은 성공했다.
이런 사연 때문인지 푸트남에 대한 평가는 극단을 오간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모사꾼`,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가 시대를 앞서나가는 혜안을 가진 `개척자`라고 평가한다.
푸트남의 전 동업자였다가 그를 고소한 루이스 보셀리노는 그를 "닳고닳은 카 세일즈맨과 같다"고 평가했다. 또다른 고소자 페인 로즈먼은 "회사의 기회를 자신의 이익으로 연결시킨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푸트남의 첫 직장인 젤더맨증권의 회장 베넷 젤더맨은 다른 평가를 내놨다. 그는 "제리 푸트남은 파생상품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 젤더맨은 "어떤 사람들은 제리 푸트남을 `배신자(renegade)`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를 `개척자(pioneer)`라고 평가한다"며 "제리는 틈새 시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어느 의견이 옳은 지는 알 수 없지만 NYSE와의 합병으로 푸트남이 월가의 중요 실력자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번 합병으로 푸트남은 NYSE 그룹의 최고 운영책임자(COO)이자 3명의 공동 회장 중 한 명이 될 전망이다. 그는 이번 합병으로 이미 1500만달러가 넘는 시세차익을 올리며 돈방석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푸트남과 현 NYSE 최고경영자인 존 테인의 궁합이 잘 맞을 것인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테인은 최고 수재들이 모인 것으로 유명한 월가에서도 줄곧 엘리트 코스를 질주했다. MIT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테인은 골드만삭스에서 기술책임자(CTO), 최고 재무책임자(CFO), 사장 등 사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입지를 굳힌 후 NYSE로 진출했다. 전형적인 월가 귀족답게 테인의 성품도 `딱딱하다(bookish)`는 평가가 많다.
반면 테인에 비해 경력이나 학벌이 보잘 것 없는 푸트남은 오직 자신의 머리와 능수능란한 처세로 현 위치에 올랐다. 어느 면에서도 유사하지 않은 두 사람이 잘 지낼 수 있을 지 의문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장사꾼 기질이 농후한 푸트남이야말로 고압적인 NYSE의 `신분체계(hierarchy)`를 깨트릴 적임자라고 평가한다. 푸트남 자신도 테인과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푸트남은 "나는 지난 1월 합병을 논의하기 위해 처음 테인을 만났다"며 "2001년 NYSE 경영진을 만났을 때 보다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