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반세기)"가자 공업대국으로"..중화학 육성②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경제구조 대전환
`산업구조 고도화` ` 방위산업 육성` 노린 복합정책
  • 등록 2005-06-30 오후 12:40:40

    수정 2005-06-30 오후 12:40:40

[edaily 이종석기자] 중화학공업은 자본집약적 산업으로 초기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정부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위해 73년 12월14일 국민투자기금법을 제정한다. 국민들의 광범위한 저축과 참여를 바탕으로 중화학공업 육성에 필요한 자금을 공개적으로 조달하겠다는 의도였다. ◇ “가용자금을 총동원하라”…국민투자기금 신설 기금은 금융기관별로 예금의 일정 범위내에서 출연하도록 했다. 은행의 경우 예금증가액의 10~40%, 보험회사는 수입보험료의 40~50%, 공공기금은 여유자금의 90%를 기금에 출연했다. 금융기관에 예치된 돈을 다시 국민투자기금에 맡기는 구조였다. 국민투자기금은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국내 가용자금을 총동원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던 셈이다. 국민투자기금 운용 규모는 시행 첫해인 74년 698억원에 불과했으나 정부의 열성적인 지원에 힘입어 78년에는 8283억원으로 12배 가까이 늘어났다. 업종별 산업단지 건설, 국민투자기금 조성 등 정부의 적극적인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공업구조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76년 "54 대 46"이었던 경공업과 중공업의 비율이 79년에는 "48 대 52"로 바뀌는 등 3년만에 중화학공업 우위로 완전히 역전됐다. 특히 61년도 40%에 달했던 1차산업의 비중은 80년들어 14.4%로 낮아진 반면 제조업 등 2차산업 비중은 같은 기간 15.2%에서 30.2%로 2배 이상 급상승했다. 전통적 농업국가에서 신흥 공업국가로 탈바꿈 하기 시작한 것이다. ◇ 자원배분 왜곡, 경제력집중 등 부작용 양산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그 경제적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열악한 기술 및 자본 수준 등에 비추어 볼 때 힘에 부치는 정책이었다. 중화학공업 육성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작용을 양산하기도 했다. 첫째, 시장과 가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계획이 정부 주도하에 입안되고 집행됐다는 사실이다. 투자분야와 규모, 담당기업 등이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정됐다. 이 과정에서 경쟁과 효율은 도외시됐고, 정책금융과 집중적인 재정투융자로 인한 자원배분 왜곡 현상이 심각한 문제로 제기됐다. 둘째, 특정산업에 대한 자원집중과 과보호로 인해 환율 금리 등 가격변수가 왜곡됐고, 이로 인해 저축률 하락과 수출경쟁력 약화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실례로 75년 당시 중화학 부문에 대한 대출금리는 연 12%인 반면 예금금리는 14~15%, 인플레율은 25.2%였다. 대출받은 기업은 곧바로 13%의 이익을 확보하게 되는 반면 저축한 가계는 10%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구조였다. 당연히 저축률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투자기금을 동원해 금융기관 예금을 저리의 중화학공업 지원 자금으로 활용한 것도 문제였다. 시장금리가 15%를 넘는데 특정 분야에만 12%대로 지원하다 보니 결국 다른 산업부문의 희생을 담보로 중화학 분야을 지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명백한 자원왜곡이자 시장교란이었다. 국민투자기금 조성을 주도한 김용환 전 재무장관 조차 “본원통화 증가와 연결될 수 있는 예금재원의 일부를 국민투자기금에 편입한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김용환,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셋째, 석유파동으로 인한 장기불황에 대비해 선진국들이 감량과 합리화 경영을 추진하는 시점에 우리는 거꾸로 경기흐름에 역행하는 확장정책을 펼쳤다는 점이다. 특히 방대한 중화학 투자를 위해서는 통화증발이 불가피했고, 이는 부동산 투기 등 만성적 인플레를 고착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넷째, 주로 대기업들이 중화학공업을 담당하다 보니 재벌기업의 경제력 집중이 가속화됐고 이 과정에서 독과점 폐해를 유발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경제력 집중은 소비자, 중소기업, 경공업 분야의 희생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형평의 문제로 지적된다. 아울러 대기업 위주의 정책지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정경유착의 뿌리가 싹텄고, 그 파장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중화학 육성의 폐해로 지목된다. ◇ “위험한 승부수…결과는 성공작” 적지 않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 육성은 성공적 결과로 마무리된다. 당시 정부가 국제시장을 겨냥해 세계 최첨단 시설과 기술을 대거 도입함으로써 산업구조 고도화와 국제경쟁력 확보를 앞당겼다는 점은 가장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 가발이나 농산물 등 저부가가치 상품을 수출하던 나라에서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등 최첨단 제품 수출국으로 변모하게 된 기반에는 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이 자리하고 있다. 또 중화학공업 육성 과정에서 잘 교육된 우수한 기술인력들이 대거 양산됐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이들은 80년대 이후 전 산업부문에 확산되면서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첨병 역할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은 제1,2차 경제개발계획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 정권이 `산업구조 개편`과 `방위산업 육성`이라는 새로운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선택한 위험한 승부수였다. 하지만 그 무리한 선택이 국내 산업구조를 고도화시키는 바탕이 되었고, 궁극적으로 한국 경제성장의 분수령이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중화학공업 육성이 없었다면 현재의 IT강국,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입성이 과연 가능했을 지 의문이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공업화 ‘시동기’에서 ‘성숙기’로 넘어가기 위한 정부의 위험한 승부수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결과는 성공작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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