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이 제정된 지 100년이 되는 올해, 김대중 대통령에 영광의 상이 주어졌다. 김 대통령의 수상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선물이자 보답이기도 하다. 노벨상이 제정될 무렵부터 서구열강과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속에 질곡의 역사를 살아오면서도 전통과 문화를 지켰고, 세계평화를 위해 힘써온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식민지의 고통과 해방을 위한 투쟁, 전쟁과 배고픔, 냉전과 분단, 혁명과 쿠데타, 독재와 민주화, 경제위기와 극복을 경험한 100년의 역사는 세계사적 사변의 압축판이다. 또 100년의 역사중 상당부분은 김 대통령의 인생 역정이 함축한다. 그는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전쟁을 경험했다. 분단의 비극인 이데올로기의 그늘에서 핍박받았다. 민주화의 중심에 늘 서 있었다. 경제위기로 시련에 빠진 국민의 지도자이자 분단의 장벽을 뛰어넘어 정상회담으로 평화의 돌파구를 연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
노벨평화상은 마지막 냉전지대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인권신장과 민주화를 위해 겪은 고난의 역정을 평가한 것이다.
김 대통령에 대해선 국내정치적 비판과 견제, 오랜 탄압의 세월이 각인한 그에 대한 일각의 부정적 시각 등이 남아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자를 용서하는 화해의 정신을 발휘하고 끊어진 남북한을 잇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그는 국내 정치의 틀에서 벗어나 전쟁과 배고픔이 더 지배적인 세계에서 더 돋보이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아직 끊나지 않은 민족분단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 대통령에게 주어진 짐이 될 듯하다. 한국은 이제 세계가 공인하는 "평화의 전도사"를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는
청와대 홈페이지를 참조하시면 상세한 자료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홈페이지 내용중 일부.
민주주의와 인간을 향한 긴여정
꿈을 가진 소년
김대통령은 1925년 12월 3일 한반도 서남쪽 끝에 위치한 목포에서 34km 떨어진 외딴 작은섬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이다. 일본인 지주밑에서 소작농을 하던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곳에서 하의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하여 1939년 졸업했다. 이어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목포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43년 졸업했다. 이처럼 어린 시절 그는 농부의 아들로 자라면서 일제 식민통치의 서러움을 체험했다. 그가 작문시간에 일제 식민 통치를 비난하는 글을 지어 급장자리를 빼앗긴 것이 한 보기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역사와 정치, 예능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치에 눈을 뜨다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운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은 그는 해운사업에 주력하여 사업에 상당한 성공을 거둔 청년실업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극심한 고난을 가져온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은 당시 점차 독재화되어 가던 이승만 정권때문이었다.
친일파를 우대하며 무능하고 부패한 독재정권에 맞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정치역정은 시작부터 불운했다. 1961년 그는 두 번의 실패 끝에 세번째 도전한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러나 당선 3일만에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고 당선이 무효된다. 그리고 정치규제에 묶이는 비운을 맞게 된다.
용기와 희망의 정치인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마침내 용기와 희망의 정치인으로 촉망받게 된다. 1965년 민중당 대변인을 거쳐 이듬해에는 정책위의장을 역임한데 이어 1967년 통합야당인 신민당 대변인이 되면서 정계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해온 그는 철저한 준비로 국회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전체적인 윤곽에서부터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비판과 동시에 항상 정책대안을 제시했다. 국회의 각종 위원회와 재무, 건설, 외교, 예산, 국방 등의 상임위원회에서 전문성을 키웠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꿈꾸면서 그는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을 저지하기 위한 역사적인 장충단공원 집회가 바로 이를 입증하게 된다.
그는 이 날 연설을 통해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야권의 결속과 민주주의 회복의 희망으로 부상하게 된다. 1971년 그는 드디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씨와 정면대결을 펼치게 된다. 관권과 금권, 온갖 부정이 난무한 가운데서도 그는 46%의 지지를 얻게 된다.
비록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지만, 국민속에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의 고비길에서
1971년 박정희의 철권통치에 대한 정면 도전은 그에게 30년에 가까운 고난과 시련의 서곡이 되었다. 부정선거로 간신히 승리한 박정희씨는 마침내 민주선거를 포기하게 된다.
1972년 10월 소위 종신 대통령을 꿈꾸며 유신헌법을 날치기 처리하여 현대판 집정관 독재체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어서 민주인사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혹독한 억압이 시작된다. 가장 강력한 도전세력이었던 김대중씨는 당연히 그 탄압의 최종목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1973년 8월 일본 도쿄호텔에서 중앙정보부의 공작원에 의해 납치당하게 된다. 그를 살해하여 한국 정계에서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의 강력한 경고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1주일만에 서울의 자택에 돌아오게 되고 모든 활동이 중단되는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단행, 꺼져 가던 민주화의 불씨를 다시 지핀다. 이로 인해 5년형을 받고 수감되어 1978년 12월 석방되었으나 또다시 연금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게 된다. 이어 두 달뒤에 그는 가택연금이 해제되고 사면 및 복권조치를 받게 된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서울의 봄"도 잠시뿐이었다. 1980년 5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내란음모혐의로 체포된다.
그 해 11월 계엄군법회의에서 날조된 내란음모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그 후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되고 1982년 12월 석방되어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군사정권의 모진 고문과 탄압, 그리고 온갖 유혹에도 굽히지 않았으며, 미국 망명중에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1985년 귀국한 뒤에도 그를 둘러싸고 가택연금과 해제는 반복되었다.
승리의 길
한국 민주화의 돌파구는 1987년 6월 항쟁에서 열렸다. 이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되었고 그는 실형면제와 복권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까지 여러번 실패를 경험했다. 1987년과 1992년 선거에서 그는 패배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준비된 대통령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네번째로 도전한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드디어 40.3%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에 취임 했다.
한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진정한 민주화의 새 날이 열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온갖 고난의 역정을 이겨온 한 정치인의 승리일 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가 함께 승리한 민주주의의 큰 성취였다.
[기본사항]
성명 김대중(金大中) Kim Dae-jung 본관 金海
생년월일 1925년 12월 3일 출생지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호 후광(後廣), 토마스 모어 본적 서울 마포구 동교동 31-1
원적 전남 무안군 종교 천주교 자녀수 3남
생활신조 행동하는 양심 주량 포도주 2잔, 소주 2잔
기호품 설렁탕, 녹차, 김치찌개 취미 영화감상, 연극관람, 독서
신장/체중 173cm/73kg 흡연량 안 피움
시력 좌우 0.5 혈액형 A형
[학력사항]
-1943 목포상업고등학교 22회 졸업
-1964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수학
-1967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1970 경희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과정 수료
-1983 미국 에모리대
명예법학박사
-1992 모스크바대학교 외교대학원 정치학 박사
-1992 미국 가톨릭대 명예법학박사
-1994 원광대 명예정치학박사
-1995 미국 포트랜드 주립대 명예인문학박사
[경력사항]
1948-1950 목포일보 사장
1951- 흥국해운 사장
1951.9- 한국해운조합연합회 이사
1957.10-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1960.10-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
1961 제5대 민의원(민주, 인제)
1963- 제6대 국회의원(민주, 전남 목포)
1965- 민중당(민정-민주 통합야당) 대변인
1966- 민중당 정책위원회 의장 겸 정무위원
1967.2- 민중당(민정-민주 통합야당) 대변인 겸 정무위원
1967.6- 제7대 국회의원(신민, 전남 목포)
1970- 신민당 대통령후보
1971.4- 제7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71-1972 제8대 국회의원(신민, 전국)
1974.11- 민족회복 국민회의 참여
1976-1978 3.1 민주구국선언사건 주도로 구속됨(대통령긴급조치9호 위반혐의)
1979.3-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1983-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 창설
1983.5- 미국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1983- 미국.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
1983- 미국, 하바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1985-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1985-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됨
1987.4-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1987.10- 평화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
1987-1991 평화민주당 총재
1987 평화민주당 대통령후보선출
1987- 제13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88-1992 제13대 국회의원(평민,전국)
1991- 신민주연합과의 통합으로 신민당 창당.총재 당선
1991-1992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야당 민주당 창당.대표최고위원
1992 제14대 국회의원(민주,전국)
1992.6-12 민주당 당무위원
1992 제14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93.12-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자문회의 위원
1993 영국 케임브리지대 객원교수
1994-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 아태평화재단으로 변경
1995-1998/2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1995-현재 국민회의 총재
1995-1997 아.태민주지도자회의 공동의장
1997.12.18 제15대 대통령 당선
1998.2.25 제15대 대통령 취임
[수상 및 명예직]
1966 미국 Memphis시 명예시민
1981 Bruno-Kerisky 인권상
1983 미국 Nashville시 명예시민
1983-현재 미국 Robert Kennedy 인권상위원회 고문
1983-현재 국제고문희생자 구원위원회 고문
1983-현재 미국 Pittsburgh La Roche 대학교 이사
1987 미국 George Meany 인권상 수상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수상
1993 미국 Atlanta시 명예시민
1993 제3회 애서가상(한국애서가클럽) 수상
1994 미국 New York Union 신학대학교 Union Medal 수령
1994 Russia 국제생태학협회 정회원
1995. 5 미국 휴스턴 명예시민
1998. 2 무궁화대훈장
1998. 4 영국 런던대 명예교수
1998. 6 미국 조지타운대 명예교수
1998. 6 미국 San Francisco 명예시민
1998. 6 미국 Los Angeles 명예시민
1998 UN 인권협회 인권상
1999. 7 Philadelphia 자유메달